예수와 분별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분별에 대해 직접적으로 가르치지 않으신 것처럼(문자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제2위격인 예수님 역시 신약의 사복음서를 통해‘ 분별’에 대해 직접 가르치시지 않았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한 사복음서에 한국어 번역으로 ‘분별’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마태복음 16장 1-4절, 예수님이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너희는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핀잔하시는 내용 중에서이다. 이어지는 4절 말씀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가신다.

둘째는 누가복음 12장 56절에서 군중들을 향해 “위선자들아, 너희가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이 시대는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꾸짖으실 때다.

마태복음에서의 분별은 그리스어로 ‘의심하다, 구분하다’는 뜻이 가장 많은 디아크리노에서 파생된 디아크리네인이 쓰였고, 마태복음 16장 3절과 동일한 의미인 누가복음 12장 56절에서는 ‘시험하고, 승인하다’는 뜻이 주 골자인 도키마쏘에서 파생된 도키마쎄인이 사용되었다. 이 두 단어의 차이는 크게 없다. ‘분별’이라는 한국어 번역이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언어의 히브리어 표현은 ‘파타르’이다. 창세기 40장 8절에서, 바로 왕의 꿈을 요셉이 해석할 때의 그 ‘해석’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 사용된 ‘분별’ 혹은 ‘해석’의 의미는‘표적이나 말의 정확한 뜻을 아는 능력’으로, 우리들이 다루고 있는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으로서의 분별의 범주에서 어긋나지 않는다.

이전에도 말했듯이, 분별하는데 영과 육을 뚜렷이 구분짓기 어렵다(귀신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인간이 관여되는 한 모든 것은 영적이고 또한 육적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잊지 마라! “우리는 율법이 영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나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어 죄의 종으로 팔렸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치 않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롬 7:14-15).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영에 속한 자였으나 육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예수님의 많은 말씀 중 분별이 단지 두 번 사용되었다고 해서 예수님이 분별에 대해 덜 강조하신 것은 아니다(문자적인 해석과 사용 횟수에 목숨 걸지 않기를 바란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성경은 창세기 1장부터 인간들의 분별력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의 분별력의 정점을 찍을 신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진다.

성경 66권 중 가장 제정신(분별력을 가지고)으로 읽도록 추천된 책이 계시록일 것이다. 환상을 보고 쓴 책 아닌가? 정신 못 차리고 계시록을 있는 그대로(문자 그대로) 믿어서 이단에 빠진 자들을 한두 번 봐왔는가?

분별은 의심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러니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우리의 분별을 요구한다. 이런 면에서 소위 인문사회과학 여러 분야에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 적용하고 말겠다는 다양한 행위나 접근 역시 분별의 관점에서는 무분별하다고 볼 수 있겠다. 우리의 성경적 혹은 영적 분별력을 가장 방해하는 것이 바로 ‘문자주의적인 해석’이기 때문이다(이 말은 반대로 우리가 문자주의의 신화에 젖어 있을 때 가장 무분별해지기 쉽다는 것이다). 문자를 있는 그대로 믿으면(믿어야) 된다는 것과, 의심하고 재해석하고 분별하는 것은 결코 양립/화해할 수 없다. 인간의 지성과 이해가 사라진 믿음이 온전한 믿음인가?

문자주의의 한계로서,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성경에서 그것도 아시아의 어느 언어 중의 하나인 한국어로 번역된 ‘분별’이라는 단어만 찾아 다니고, 혹 그 말의 유무와 횟수에 따라 적용의 중요도가 매겨진다면(이것도 사실은 분별을 요구한다) 그야말로 우리는 가장 분별없이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믿고 있는 것이다. 자간이나 문맥간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더 크게 신약과 구약의 관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어느 문자 하나에 국한되어 표현된다면, 밴쿠버 리젠트 칼리지의 제임스 패커 교수가 약 500페이지에 걸쳐 쓴 『하나님을 아는 지식』(IVP, 2010)은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온갖 잡소리일 테니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들의 이성이 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이해될 때, 올바르고 균형 잡힌 신앙의 근본으로 발전한다. 이런 과정이 곧 분별의 과정이다. 그렇지 못하면 광적인 신앙이나 일방적인 신앙이 된다. 우리는 문자중독자가 되면 안 된다. 도리어 문자가 뜻한 바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해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이 말씀하신 수많은 비유들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 크게 어긋난 길로 가지 않으며, 우리의 현실에 맞게 나름대로 적용할 수 있게 된다. 신약의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특별히 ‘분별력 강의’를 하시지 않았지만, 사복음서 전체에서 분별은 떼어놓을래야 놓을 수 없는, 예수님과 그의 지상 사역을 이해하는 데 골자가 된다.

예수님의 지상사역의 우선적인 목표는 본인 스스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분별하고 행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9).

그리고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구약(태초)에서부터 예언되어왔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그렇다.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으로서 죄 중에 있는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지상으로 보내진 분이다: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노아의 홍수 이래로 유보되어온 악하디 악한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을, 직접적인 징벌이 아니라 화목 제물로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려고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 창조주가 십자가상의 구속주가 되시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게 인간들의 대한 하나님의 정의이다. 칼에는 칼, 눈에는 눈의 보복적인 정의가 아니라 인간들을 대신해 죽으심으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그림자가 화해와 평화의 빛으로 전환되는 회복적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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