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사랑이 희망이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라파 공동체라는 알코올 중독자 치료 공동체를 운영하는 윤성모 목사님이 쓰신 책입니다. 이 책을 읽고, 진짜 인생 막장이 알코올 중독자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책에 등장하는 한 알코올 중독자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못나고 못된 사람을 말할 때 개만도 못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개만도 못한 사람이 아니라 죽은 개만도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개만 되어도 다행이지요. 개들은 그래도 집도 지키고 주인에게 충성하지 않습니까? 술 마실 때의 제 모습을 어찌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죽은 개의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의 경찰들도 저를 보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제발 부탁이니 이 동네를 떠나 달라고 제게 사정했지요. 맨 정신으로 술집에 들어갔다가 눈 뜨면 파출소였던 날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죽은 개만도 못한 삶'이란 도대체 어떤 삶일까요? 그분의 말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만 알코올 중독에 걸려 밑바닥까지 떨어져 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비참한 삶입니다. 끝까지 현실을 외면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병이 바로 알코올 중독이라는 병입니다.

알코올 중독은 모든 것을 다 잃고 모든 관계가 다 파탄이 난 후에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수없이 반복한 실수를 또 범하는 자신을 끝까지 믿도록 만듭니다.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술을 끊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까짓 거 죽으면 되지'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병, 그것이 바로 알코올 중독입니다. 관계를 회복하고 인간답게 살고 싶어도, 알코올 중단에 따르는 금단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알코올의 노예가 되는 무서운 병입니다.

전 세계 알코올 중독 회복자들이 암송하고 있는 회복에 이르는 AA 12단계의 제1단계는 자기 무력감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으로부터 치유가 시작된됩니다. "우리는 알코올에 무력하며, 나 자신의 삶을 처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회복의 가능성 유무는 이 고백의 진실성에 달려 있습니다. 알코올에 무력하며 자신의 삶을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마음 한구석에 '알코올에 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다.' ‘비록 지금 단호하게 실천하지 못하고 있지만, 주변 상황이 나아지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면, 그때부터는 다른 사람들처럼 마시고 싶을 때, 마시고 싶은 양 만큼 마실 수 있다.'라는 의식이 숨어 있습니다.

그 의식을 처리하지 않는 한, 회복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알코올에 전적으로 무력하며, 내 삶도 알코올에 의해 전적으로 망가졌고, 술로 인해 내 인생은 수습 불가의 국면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100% 인정하는 것만이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알코올 중독이라는 병의 실체를 깨닫고 자기 자신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알코올 중독이라는 무서운 병을 통해 인간을 사로잡은 죄의 실체를 바라봅니다. 죄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알코올 중독은 그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 중에 가장 죄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병은 중독이라는 이름이 붙은 병들입니다. 인터넷 중독, 게임 중독, 성 중독, 마약 중독, 주식 중독, 운동 중독, 쇼핑 중독, 성형 중독 등등. 중독 같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을 휘어잡아 노예로 만드는 모습은 똑같습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고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 7:20-22).

죄는 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기가 어렵습니다. 죄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꼼짝 못하게 사로잡습니다.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실체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법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위대한 영적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죄의 노예 상태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합니다. 죄에 사로잡히는 현상 그것이 바로 중독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떠한 중독도 그 결말은 파멸이요, 즉음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모든 중독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입니다.

중독의 특성은 은밀함입니다. 은밀함은 중독의 가장 치명적인 무기입니다. 중독의 무서운 점은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거나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데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사단의 도구이기 때문에 중독은 현란한 변신이 가능합니다. 해로운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유익을 가져오는 선의 도구로 가장합니다. 거기에 현혹되어 중독되면, 자신이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가장 치명적인 중독은 과연 무엇일까요? 죄 그 자체입니다. 죄에 중독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에 죄에 시달리는 자신을 본다는 것은 깊은 영적 깨달음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라는 탄식은 죄의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동시에 출발점입니다.

죄가 가장 중요하게 사용하는 도구가 부입니다. 그래서 부 역시 강력한 중독 증상을 나타냅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부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부의 은밀함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에 대해 자주 언급하시는 이유도 바로 부가 은밀하고 막강하기 때문입니다.

 

부는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부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마음대로 우리를 휘두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청지기 비유를 통해 그것을 보여 주십니다(눅 16:1-9). 부재지주인 한 부자는 재산을 관리해 주는 청지기를 두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농사에 필요한 것들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습니다. 청지기가 주인을 대신해 계약서를 작성하는데, 그 과정에서 청지기는 별도로 이익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주인의 귀에 청지기의 부정이 들려왔습니다.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를 해고하려고 그 동안의 거래 내역을 작성하라고 일렀습니다. 해고될 것임을 안 청지기는 이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땅을 파거나 구걸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몸이 약해 땅을 팔 수도 없고 구걸을 하자니 체면이 걸렸습니다. 그는 기막힌 해결책을 발견해 냅니다. 그는 빚진 사람들을 불러 빚을 줄여 주었습니다. 자신의 이면 계약 내용을 원래 주인에게 보고하던 내용대로 적게 한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불의한 이 청지기의 행동을 알게 된 주인은 뜻밖에도 청지기가 슬기롭게 처신했다고 칭찬해 줍니다.

주석가들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비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수수께끼 같은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금융 관행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의 금융 관행을 알기 위해서는 희년법이라는 특수한 율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에는 청지기가 채무자들과 계약을 맺을 때 25% 내지 50% 정도의 높은 이율을 부과했다는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계약서를 작성한 사람은 청지기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이자가 누구의 몫인지는 청지기 외에는 알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자 받는 일을 율법으로 금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은밀하게 이자를 받는 방법을 고안했고 유대 사회도 그것을 눈감아 주었습니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빌려줄 때 그 물품이 긴급한 필수품에 해당하지 않으면 이자를 부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긴급한 경우인데도 이자를 받으려고 긴급한 필수품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여인이 기름이 한 방울밖에 남지 않아 기름을 빌리려 한다면 그때 여인에게 빌려 주는 기름은 긴급 필수품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기름 한 방울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인이 기름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면 그 여인은 기름을 빌릴 수 없었습니다. 이자를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빌려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맹점을 이용하여 공공연하게 이자 사업이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긴급 필수품이라는 규칙은 주로 밀과 포도주와 같은 생필품에 해당되었지만 돈을 빌려주는 경우에도 생필품으로 환산하여 이자를 부과할 수 있었으며 이율을 계약서에 기재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당시의 금융에 관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곤경에 빠진 청지기는 불법으로 매겼던 이자를 면제해 주기로 합니다. 불법 이자를 감춤으로써 그는 분명 도덕적으로 불의했지만,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졌습니다.

당대의 토지법에 따르면 채무자가 이자를 내지 못하면, 청지기는 그를 노예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따라 이자는 처음부터 받을 수 없었습니다. 주인은 청지기가 이자를 받는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구전 율법에 의하면 청지기가 주인의 허가 없이 이자를 면제해 줄 경우 주인은 청지기의 결정을 따라야 했습니다. 청지기의 이러한 결정 덕분에 주인은 친절하고 후덕한 채권자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이자는 주인의 몫이 아니라 청지기의 몫이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더 큰 불의를 저질렀는데도 그것을 칭찬하는 이상한 주인의 이야기를 그 배경을 통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청지기는 불의한 빚을 면제해 준 일을 통해 의로움의 모델이 됩니다. 채무자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그 역시 채무자들에게서 친절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청지기가 율법을 지키고 의롭게 행했다고 칭찬합니다. 그런데 그 뒤를 이어 전복적인 말이 등장합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8)

"빛의 아들들"은 당시 바리새인들을 지칭하던 말이었습니다. 빛의 아들이라고 불리던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었고 하나님의 율법을 피하기 위해 교묘한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예수님은 날카롭게 그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빛의 아들들"이라는 호칭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바리새인들의 모습 속에서 교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통렬한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16:13)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5)

우리는 날카롭게 오가는 말씀들의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 중에 높임 받는 것을 추구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인지상정이라는 말로 정당화될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의 무서운 범죄입니다.

청지기는 두 주인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이자를 금하고 바리새인들의 법은 그것을 허용했습니다. 두 주인의 명령이 충돌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을 깨달은 불의한 청지기는 하나님의 법을 선택했습니다. 상황이 뒤바뀌었습니다. 비열한 인간이 영웅이 된 것입니다.

아람어인 맘몬 혹은 마몬은 재물이나 돈, 재산, 이익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맘몬이 하나님과 대등하게 맞선다고 보셨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재물은 신처럼 군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어떤 것에도 신적인 지위를 부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부가 마치 신이 되어 우리를 지배하려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비난하시는 것은 부 자체가 아니라 부의 노예가 되는 일, 곧 부에 집착하는 태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돈 중독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복하느냐, 아니면 물질적 소유 다시 말해 부에 열광하느냐로 나뉩니다. 우리는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의 노예가 된다면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물질 만능주의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부의 제단에 무릎을 꿇고 부를 예배하고 부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사치품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조종합니다. 맘몬이 신의 자리에 앉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특히 혐오스러운 일은 신앙과 하나님 나라를 앞세우면서 재물을 축적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청결케 하시면서 종교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행위를 질타하셨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막 11:17, 마 21:13, 눅 19:46, 요 2:16).

상인들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이 불법적인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단에 바칠 "정결한" 돈을 교환해 주고 희생 제물로 쓸 동물들을 팔아 큰 이익을 남겼습니다. "합법적" 제도를 고안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늑탈했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체제를 이끈 그들을 가리켜 예수님은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 부를 쌓는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일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눅 16:15). 막대한 부는 성공의 최정상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가치가 전도된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물질적인 성공이 가장 낮은 위치에 놓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청원할 때, 우리는 부의 중독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음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즐긴다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 바리새인들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열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는 그들의 삶 자체였습니다. 그들의 일상의 삶은 종교적인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추호라도 모자라는 점이 없을까 자신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죄에 중독되었다는 사실, 부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죄의 은밀함, 부의 은밀함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셔도 듣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비웃고 자신들을 존경하지 않고 우습게 여기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죄란 그토록 무서운 것입니다. 중독이란 그토록 은밀하게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병입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그들은 자신들이 "빛의 아들들"이라 확신하였지만 예수님의 판결은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만이 그들을 죄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부의 노예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내려진 심판은 지옥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청원은 오늘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고백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죄와 부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분이 하나님이시고,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하는 우리의 가난이 그것을 가능케 해줍니다.

"우리는 알코올에 무력하며, 나 자신의 삶을 처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알코올 중독자의 고백은 죄에 중독된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부에 무력하며 나 자신의 삶을 처리할 수 없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지 않는 한 우리는 죄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이 아니라 부를 주인으로 섬기는 "빛의 아들들"이 될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더러운, 죽음의 병을 앓는 낙오자가 될 것입니다.

참된 신앙의 길은 바리새인들처럼 자랑스럽게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이 가는 길이 아니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처절한 자기 절망의 탄식 속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청원을 주님께 드리는 순간마다 우리는 꾸짖지 아니하시고 지혜와 사랑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풍족한 삶을 누리며 참된 쉼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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