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복음의 장애물

어느 시대건 사회적 안정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는 성격을 달리하는 여러 권력 집단들이 극도로 위태로운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군사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로마라는 점령군 세력이 있었고, 수도 예루살렘에서 헤롯 왕조의 정권을 장악하려던 헤롯 당원들이 있었고, 지하운동 세력인 열혈당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로마인들에게 항거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과 그 밖에 국가를 이끌어 나가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경제적인 세력으로 점령군 세력과 결탁하여 체제를 유지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외교 수완을 동원하여 평형 상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세력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평형 상태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변수로 등장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믿음에 관한 것이었으나 그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변화를 몰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서는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막 10:42-45) 폭력이 또 다른 폭력에 의해 보복당하지 않아야 했습니다(마 5:38-42). 예수님은 불신과 지배가 아닌 신뢰와 비폭력을 기초로 한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평형 상태에 있는 그들의 사회구조를 무너뜨리고 그들의 기득권이 침해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똑같은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부라는 기득권을 포기해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주기도의 청원은 심각한 결단을 요구합니다. 예수님 당시 지배계급에 속해 있던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여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분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욕심이 부를 좇게 하고 하나님을 요술 램프의 요정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재물과 부에 관한 그분의 견해는 분명합니다.

부유한 관원

어떤 관원이 예수님께 다가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심각한 질문을 던졌습니다(눅 18:18-30). 이 똑똑한 관원의 이야기는 그 뒤에 나오는 삭개오의 이야기와 비교해 보면 그 의미가 뚜렷해집니다. 관원과 삭개오는 상반된 선택을 하였습니다. 두 사람 다 부자였고 권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예수님을 만났지만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부자 관원은 부자였고 젊었으며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왜 예수를 찾아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의 질문을 통해 영생으로 가는 그의 행보가 부족하게 여겨졌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그는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부와 연관시키십니다. 이 부유한 관원은 정직하고 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착실하게 율법을 배우고 지켜온 성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걸은 길은 정통이었습니다.

어쩌면 관원은 자신의 선한 행위와 삶에 대해 예수님의 인정을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어야 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팔라"는 말보다 "좇으라"는 말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좇으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라는 초청이며, 그것이 바로 관원이 원하는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하지만 부자 관원은 재산을 팔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관리는 결과적으로 영생을 포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요약하시며 가혹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혹한 선언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눅 18:25-26).

참으로 무서운 선언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군중들이 예수님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26)라고 질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27)였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부자도 마귀와도 같은 부의 권세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란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부를 포기하는 일도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는 근심하며 발길을 돌린 관원과 삭개오 사이에 두 개의 짧은 이야기로 다리를 놓습니다. 첫째 이야기에서는 눈이 있는 제자들이 진리를 보지 못하고,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눈먼 사람이 눈을 뜨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임박한 십자가 사건에 대해 말했을 때 제자들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짜 메시아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알아들었어야 할 제자들이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관원과 마찬가지로 진리에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를 보면 여리고에 가까이 왔을 때 눈먼 거지가 등장합니다. 그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자비를 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갑자기 눈 먼 사람이 보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이 두 이야기를 통해 누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삭개오를 만날 준비를 시킵니다.

닐스 라르센 스티븐스의 삭개오, 출처: 위키피디아

삭개오

삭개오는 키가 작았지만 꽤 큰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19:1-10). 여리고는 상업의 중심지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주변 지역은 비옥하고 관개시설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지역은 발삼 나무의 경작지이기도 했습니다. 그 나무에서 추출되는 향유는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과 요단 동편 이방지역을 연결하는 교역로의 관문이었습니다.

삭개오는 그 지역을 총괄하는 세리장이었습니다. 자기 밑에 여러 사람들을 거느리고 그들에게 세금 거두는 일을 맡겼습니다. 돈이 넘치는 지역에서 그 일은 큰 돈을 버는 사업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 되기 위해 많은 돈을 투자하였습니다. 투자한 금액을 회수하고 수익을 올리기 위해 폭력과 부정한 방법들이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들, 특히 세리장은 원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로마인들을 위해 세금 거두는 일을 했기에 더러운 인간이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들은 법정에서 재판관은 물론 증인도 될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 노예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정치적 권리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서 나온 돈은 더러운 것으로 여겨져 구제금으로도 사용될 수 없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세리들과 어울리는 일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부정한 일이었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은 '의로운 자'입니다. 사람들이 경멸조로 붙여준 별명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의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의도적으로 부정한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삭개오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 결과는 기적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배려와 긍휼하심이 삭개오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삭개오는 크게 감동하여 놀라운 일을 행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8)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기적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악당 중의 악당인 그에게 일어난 일을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삭개오의 마음이 변하고, 그 결과 그가 부를 포기했습니다.

구원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9-10) 놀라운 선언입니다. 삭개오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개인적 구원과 사회적 책임을 하나로 묶으셨습니다.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과 함께할 때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자가 바늘구멍을 통과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삭개오의 주변에 이루어졌습니다.

놀라운 역전입니다. 부유한 젊은 관원은 신실한 신앙인이었으나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삭개오는 신앙과는 거리가 먼 형편없는 사람이었지만 부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였습니다. 부유한 관원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협잡꾼인 삭개오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관원의 이야기에서는 부와 물질에 대한 관심이 믿음을 방해합니다. 삭개오의 이야기에서는 믿음이 부와 물질을 주도합니다. 관원은 훌륭한 믿음을 가졌으나 하나님의 공의를 부정하므로 유죄 판결에 이릅니다. 삭개오는 형편없는 믿음을 가졌으나 하나님의 공의를 긍정하고 실천함으로써 참된 구원에 이릅니다. 이 두 이야기에서 개인적인 영적 체험은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로 연결됩니다. 그것이 바로 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리스도를 좇는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이 끝나갈 무렵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그 후 곧바로 다시 성전을 찾으셨습니다. 거대한 성전 금고가 있는 건물로 들어가신 예수님은 사람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부자들이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지는 은화를 연보궤에 넣었습니다. 그때 가난한 한 과부가 구리로 된 동전 두 닢을 넣었습니다. 보잘것없는 푼돈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과부를 가리키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눅 21:3-4).

이 이야기 바로 앞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을 가리켜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20:47)고 비난하셨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과부는 버림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과부는 남편의 재산을 유산으로 받을 권리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장남이 재산을 물려받았습니다. 만일 아들이 없으면 죽은 남편의 형제가 그 과부에게 장가들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 형제가 장가들기를 거절하거나 형제가 없으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거나 구걸을 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과부들은 공적이고 종교적인 생활에서 아무런 지위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흔히 검은 옷을 입고 다녔으며, 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힘없는 과부들은 부자들의 억압과 수탈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이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다고 비난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종교 법규를 만들고 그 법규들을 내세워 과부들의 가산을 늑탈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장황하고 외식적인 기도로 자신들의 불의를 감추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 율법학자들을 꾸짖은 뒤, 돌이켜 과부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동전 두 닢을 넣었습니다. 이 동전은 렙돈으로, 당시 통용되던 화폐 중 가장 적은 단위의 그리스 동전이었습니다. 렙돈 128개가 모이면 하루 치 품삯인 한 데나리온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과부는 하루 품삯의 64분의 1을 넣은 것입니다.

그렇게 적은 돈을 헌금한 과부를 보고 예수님께서 감동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가 부자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들과 달리 과부는 자기가 가진 전부를 연보궤에 넣었습니다. 반면 부자들은 재물의 일부를 넣었을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돈의 액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원칙 하나를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액수로 헌금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헌금이 재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보십니다.

칭찬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보인 믿음의 태도를 칭찬하셨습니다. 과부는 얼마든지 헌금을 안할 수 있는 구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남은 두 렙돈을 바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비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생활비 모두를 넣었습니다. 남은 것이 없습니다. 이제 그녀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기도를 드리겠습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입니다.

과부가 드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청원은 가난한 사람들을 포함한 우리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와 고아들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녀의 기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가 하나님의 귀에 들릴 때 모두가 함께 먹을 수 있는 하늘의 만나가 공급되는 것입니다.

두 렙돈을 넣은 과부가 부자들보다 더 많은 것을 넣었다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과부는 굶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 과부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먹을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통해 공급될 것입니다. 부자들의 돈으로도 구제가 가능하지만,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은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던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가난은 다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부란 그렇게 우리의 신앙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부에 관한 태도로 신앙의 참과 거짓이 드러납니다. 부에 관한 태도야말로 신앙의 시금석입니다.

가난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헌금 액수가 적다고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기도가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신뢰하며 그분께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뿐 아니라 오늘도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수많은 지구촌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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