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독교 왕국(Christensom)

‘기독교 왕국’은 4세기 이후 서구사회를 지배해 온 종교문화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후, 기독교는 제국의 종교가 되었고 문화의 중심에 기독교가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소외되고 체제 전복적이며 핍박 받는 종교였던 기독교가 공인된 국가 종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G. K. 체스터턴이 말한 것처럼, 교회와 국가의 친밀한 관계는 제국을 위해서는 좋은 것이었으나 교회를 위해서는 나쁜 것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왕국은 교회와 국가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왕국은 유일한 거대담론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250여 년 동안 기독교 왕국은 쇠락을 거듭해 왔고, 현대에 이르러 그 양상이 심화되었습니다. 많은 역사가들은 서구 문화를 ‘후기 기독교 왕국 문화'라고 부릅니다. 실상 서구 사회의 기독교 왕국은 종결되었습니다.

2001년 9.11 테러 공격이 있은 뒤, 미국의 바나 그룹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절대적인 도덕적 진리'를 믿는다고 응답한 사람은 15%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칭 거듭난 기독교인의 3/1만이 '절대적인 도덕적 진리'를 믿는다고 응답했습니다.

미국은 그래도 낫습니다. 호주의 기독교인은 2%에 불과하고, 영국은 더 심각해 지금의 추세대로 신자가 줄면 머지않아 모든 교회들이 문을 닫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후기 기독교 왕국 시대에 접어든 서구 사회에서 교회가 직면한 상황입니다. 로마 제국이 끝난 것처럼 기독교 왕국 시대도 끝났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적대적인 문화 가운데 고립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더 이상 지도적 위치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은 다만 기독교 왕국 시대의 몰락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왕국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다른 나라입니다. 오히려 기독교 왕국으로 말미암아 참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기독교 왕국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고상한 문화를 향유하고, 주류사회의 일원이 되게 함으로써,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말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기독교 왕국의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좇아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삶의 태도를 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주장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그저 품위 있고 정직한 시민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

구약학자인 월터 브루그만은 바벨론으로 유배되었던 유대인들이 경험했던 것과 현대 기독교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혼란과 불확실성과 불연속성 간에 많은 유사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벨론으로 유배되었던 유대인들은 시편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바벨론 강가에 앉아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 놓고 바벨론 통치자들의 찬양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인 자신들이 유배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처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또한 교회가 사라지고, 교인 숫자가 줄고, 기독교의 진리가 영향력을 잃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상실감을 느낍니다.

선지자적 외침이 필요한 시기

그러나 기독교 왕국의 종말은 한편으로 기쁜 일입니다. 기독교 왕국이라는 거대한 그늘 속에서 복음은 본래 가지고 있던 엄청난 영향력을 상실했습니다. 맘몬주의와 성공주의와 기복주의가 그동안 기승을 부렸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현재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외쳐야 합니다.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해야 하는 기도가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입니다. 오늘날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그것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보여 주는 사건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내지 선교로 유명한 선교사입니다. 그가 길을 가는데, 돈이 없어 고통을 겪는 이웃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주머니 속에는 은화 한 닢밖에 없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망설였습니다. 그냥 지나치자니 마음이 아프고 그것을 주면 당장 자신이 쓸 돈이 없었습니다. 그는 잠시 기도한 후에 은화 한 닢을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마음은 홀가분했지만 당장 내일 일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금식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때 우편배달부가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봉투 속에는 금화 한 닢이 들어 있었습니다. 금화 한 닢은 은화 열 닢에 해당하는 큰돈이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 수녀가 어렵게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수리를 해야 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가진 돈은 은화 한 닢밖에 없었습니다. 수녀는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은화를 연못 속에 던져 넣으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녀는 혼란스러웠지만 그 돈을 연못 속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예상치 못한 큰돈이 들어와 집수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기적 아닌 기적입니다. 이런 기적들은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경우가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을 위해 기도할 때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위대한 힘입니다. 무력함을 통해 일어나는 기적이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오는 놀라운 기도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Lambert Lombard 작

교회는 변두리에 있어야 합니다

복음서들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회의 변두리, 외딴 곳에서 적극적으로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중심에 위치하려고 경주합니다. 힘없고, 돈 없고, 능력이 부족하고, 경쟁에 뒤진 사람들은 변두리로 밀려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회의 변두리 외딴 곳에서 적극적으로 일하시는 이유는 힘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항상 변두리를 향해야 합니다.

"교회는 진정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더욱 작아져야 한다. 교회는 예언자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듣기 위해 더욱 여위어야 한다. 교회는 어둠을 빛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아픔에 더욱 민감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이끌기 위해 더 나은 윤리의식을 지녀야 한다. 교회는 언제나 궂은일을 해야 하기에 겉옷이 더러워야 한다. 교회는 세상의 중심이 아닌 변방을 교회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가난한 이들의 슬픔과 번뇌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그 사랑이야말로 교회다운 마음 씀이다.

참으로 교회가 지상의 변방을 잊어버린다면 천상의 중심을 잃어버릴 것이다. 교회가 생명의 밀알이 되어 울타리 밖 변방의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지 않을 때, 교회는 신원과 정체성을 상실한 채 천상의 중심이랄 수 있는 성령의 혼을 잃어버린 쭉정이가 될 것이다. 진정 교회는 자신을 온전히 비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로 다가가 인간존엄성 차원의 이해심과 연대의식으로 그들과 인격적으로 깊이 결합하면서 삶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정중규)

변방에 있는 이들은 힘이 없습니다. 변방은 힘이 없기 때문에 머무는 곳이며 힘이 있는 자도 힘을 잃게 되는 곳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말대로 우리가 약하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고, 누룩처럼 하나님 나라의 에너지가 충만할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바로 그 희망을 보여 주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우리를 변두리로 몰아내신 하나님의 인도에 감사를 드리길 바랍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누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무리들을 마을과 촌으로 돌려보내 무언가 먹을 수 있게 하자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의 가장 위대한 계명을 만납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주님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없삽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은 것이 아닙니다. 나누어 줄 음식이 있으면 나눌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기사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그들이 다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청원이 주기도에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고 기도할 때, 모두에게 일용할 양식이 공급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동일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십 명씩

엄청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남자만 오천 명이라는 기록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수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무리들을 대략 오십 명씩 나누어 앉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통하기 쉬운 작은 공동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작은 그룹으로 모이자 "무리"들은 사라지고 개인들이 두드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작은 그룹을 이루어 앉게 되자, 서로 인사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후에 떡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 모습을 무리들이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적은 떡을 당신의 작은 공동체와 나누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잔치를 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똑같이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갖고 있던 적은 음식을 꺼내 하늘을 향해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그것을 떼어 서로 나누기 시작하자 잔치는 더욱 활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축제인 것을 그들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친밀하게 소통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음식을 나누자 모두가 충분히 먹고도 음식이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각자 자신의 음식을 먹는 대신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음식이 끝도 없이 불어나 많은 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수 있게 되었다는 오병이어의 기적도 중요하지만, 작은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인간다워질 것을 요청하십니다. 일단 이런 공동체가 형성되면 사람들 간의 장벽은 무너지고 인간적 유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서로 친구가 되고 함께 기도하며 은혜를 나누는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의 빛 속에서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늘날 ‘저에게’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게 하신 것입니다.

밥은

시인 김지하는 <밥>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 하늘을 혼자 가지지 못하듯이 /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 밥은 하늘입니다 /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 밥은 하늘입니다 / 아아 밥은 /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밥을 나누어 먹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남의 배고픈 사정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다른 이들의 몫으로 남겨 놓을 줄 아는 마음, 배가 고파도 다른 지체들을 위해 기다릴 줄 아는 마음, 산짐승들의 겨울나기를 위해 밤과 도토리를 남겨두는 마음, 바로 이것이 하늘의 마음이고 평화의 문을 여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하늘을 담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 십자가 사건과 더불어 모든 복음서들에 기록된 사건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기적은 성찬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묘사하며, 성찬이 갖는 사회 정의의 차원을 드러냅니다. 이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심지어 먹을 것을 나눌 정도까지 배려하라고 초청합니다. 교회로 하여금 세상의 굶주림을 없애라고 강력하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을 생각할 수 있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가 가지는 엄청난 함의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순히 경제정의만을 요구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라는 명령만도 아닙니다. 이 기적 이야기는 서로 관계를 맺고 친구가 되라는 초대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들 한복판에 계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영원한 잔치라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청원은 그곳을 향한 기도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참된 '나'와 '우리'를 동시에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