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성별을 자녀 결정에 맡기고, 임신 전 성별 선택과 성별 낙태를 허용하는 문화 속에서

자일러와 케이딘 샤프는 매사추세츠 주 캠브리지에 살고 있는 3살 된 이란성 쌍둥이다. 누가 딸이고 누가 아들인가? 이들의 부모가 아이들 스스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해 지난 7월 중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네이트와 줄리아 샤프는 출생 시부터 두 아이의 생물학적 성을 비밀에 붙였다. 그들은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신체적 특징을 자녀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 부모는 아이들이 성을 결정하도록 허용할 예정이다. 그러한 아이들은 “theyby(3인칭 복수형 대명사와 베이비의 합성어)”로 알려져 있다.

또 다른 부모는 정반대의 결정을 했다. 모델인 크리시 테이건과 가수 존 레전드 부부가 아이의 성을 미리 선택했다는 소식은 2016년 미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이 부부는 체외수정으로 임신했으며, 여성 수정난 선택을 요구했다.

또한 ‘성별 낙태“는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태아가 원하지 않는 성을 가졌을 경우 낙태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성별 선택을 일임하는 일, 아이의 성을 미리 선택해 출산하는 일 그리고 성별에 의한 낙태는 모두 기초 질병의 증상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처럼 될 것”(창세기 3:5)이라는 유혹에 굴복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으며(창세기 1:27),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다(갈라디아서 3:28)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기 전에 우리의 삶에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예레미야 1:5).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의 문화는 그렇다고 우리가 믿는 것이 진리라는 거짓말을 수용해 왔다. 그러한 상대주의가 1960년대의 성적 혁명과 1973년 낙태 합법화를 합리화시켰다. 그러한 상대주의가 2015년 동성결혼을 잉태했으며, 우리의 몸과 삶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바꾸도록 만들었다.

앤 그래함 로츠는 자신의 영성 일기에서 질문한다. “다차선 고속도로에 방향이나 교통 규칙을 알리는 표지판이 없을 경우 야기되는 혼란을 상상할 수 있는가? 사고와 혼잡이 일상이 될 것이다. 운전자들은 경계를 알리는 표지가 유익과 안전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기에 아무도 그것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경계를 부인하고 자신의 도덕적 코드에 따라 성장한 이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들에겐 평화도 없고 안전한 느낌도 없다. 도덕적 가이드라인은 평화와 안전 속에서 살도록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 범죄와 이혼, 낙태와 자살 통계는 하나님의 경계 밖에서의 삶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 준다.”

변호사이자 작가인 조슈아 로저스가 폭스 뉴스에 기고한 최신 칼럼의 제목은 “내 결혼에서 일어난 가장 두렵고 굴욕적이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무슨 일일까?

결혼 첫해에 부부는 친척집을 방문하는 동안 말다툼을 했다. 부부는 손님방으로 들어가 “사적인 말다툼”을 했다. 조슈아는 베이비 모니터를 껐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반대로 음성까지 켜놓았으며, 거실에 있던 사람들이 부부 싸움의 내용을 전부 듣게 되었다.

로저스는 자신의 창피한 체험을 우리에게 적용시킨다: “바깥에서 당신은 편안하고 사교적이고 괜찮은 사람이다. 누군가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모욕적인 글을 올리거나 직장 동료를 험담한 적도 없다. 당신은 친절하고 좋아하고 싶은 유형의 사람이다. 심지어 존경까지 받는다. 하지만 집에 들어가 문을 닫는 순간 나타나는 누군가가 바로 당신의 실제 모습이다.”

그는 우리가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상처를 입힌 사람들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믿고 필요로 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라고 독려한다.

성(젠더)은 “유동적”이고, 생물학적 성에 기초한 낙태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문화적 주장을 거부하는 일이 내게는 쉽다. 하나님이 “프리웨이에 그어놓은 선들”이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 위험을 막아 준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그러나 내 사생활이 공적인 생활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내가 나 자신의 신이라는 상대적인 문화에 실제로 동의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바라지 않아도 내가 바라는 바대로 선택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 관한 진리를 알고 계신다. “사람은 겉모습을 보지만 여호와는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사무엘상 16:7). 성령께서는 우리를 통해 우리의 문화에 말하길 원하시지만, 오스왈드 체임버스가 지적한 대로 “품성이 계시를 결정한다.” 우리의 은밀한 죄가 우리의 공적인 사역을 제한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가진 것 혹은 우리의 겉모습이 우리라고 하는 문화에 동의할 수 있다. 우리는 은밀한 죄로 인한 죄책감을 느낄 수 있고 우리의 실패에 대해 우리 자신을 스스로 벌주며 우리를 정당화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반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고 노래할 수 있다(시편 136:26).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 당신은 당신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많이 생각하는가?

(문화사역자 짐 데니슨 박사의 7월 23일 칼럼 발췌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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