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용서와 죄사함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자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백성은 용서 받은 사람들이며, 그들의 삶의 특징은 한 마디로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사함과 용서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으로 깨닫기 위해 우리가 이르러야 할 은혜의 자리는 바로 처절한 절망의 자리입니다.

한 성경학자는 로마서를 성경 말씀 중의 보석이라고 했습니다. 그 보석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로마서 8장이라고 했습니다. 그 첫 부분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죄사함을 선포합니다. 그 죄사함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양자의 영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 모든 피조물 또한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보증의 말씀을 지나, 아무도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는 승리의 선언에 이릅니다.

그런데 8장에 이르기 전에 거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7장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자기 절망의 자리입니다. 죄사함과 양자됨과 성령의 보호하심과 승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절망이라는 실패의 경험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절망의 과정을 겪지 않은 사람은 결코 죄사함이 무엇인지 그것이 왜 은혜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교회답지 못한 것은 처절한 절망의 자리에 이르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성공하여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잘못 가르치고 그것을 진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처절하게 깨어진 심령만이 들을 수 있는 진리이며 자기 절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살아낼 수 없는 이상입니다.

교회와 인간의 커다란 약점은 자신의 깨어진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진면목임에도 불구하고 감추고 회피하고 둘러댑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우리의 자아는 영적으로 말짱하고, 겉보기에 행복하며, 겸손으로 위장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기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체면을 잃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정말 겸손한 사람은 제 속이 드러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병들고 교활하고 음흉한 자아의 참 모습이 드러나도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미 절망의 자리를 지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 평가가 낮은 것이 아니라 아예 자기 평가라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가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겸손은 하나님을 향한 관심, 피조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 경청 그리고 나를 비우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나의 절대적인 부족함을 인식하면서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하는 거기에서 참된 믿음과 소망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가식이 없고, 영적인 우월감이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영적으로 텅 빈 것을 알고도 쩔쩔매거나 감추려 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비난에 과민 반응을 보이지 않고 칭찬에도 우쭐대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식하고, 받은바 선물을 감사하며, 자신에 대해 과도하게 심각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죄사함과 양자됨과 피조물들의 구원과 하나님의 섭리와 승리의 기쁜 소식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주기도의 청원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의 기도입니다. 깨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참된 신앙과 믿음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말씀하신 대로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입니다(고후 12:9).

그래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메시지』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3)를 "자신이 깨어진 자임을 아는 자들은 복이 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이 깨어진 자임을 아는 자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르지 못한 것은 바로 자신이 깨어진 존재임을 보지 못하는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이며 교회들의 모든 문제들은 인간들이 자신의 그러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방어기재는 우리의 자아 인식을 왜곡합니다. 거부와 상실과 정서적 고통과 같은 인생의 어려움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는 순기능도 있지만, 방어기재는 우리로 하여금 거짓된 자아라는 가면을 쓰고 수시로 변하는 상황 속에서 안정을 유지하도록 만듭니다. 겸손은 바로 이 같은 방어기재 없어도 상처받지 않는 인생의 올바른 해결책입니다.

리처드 로어는 "겸손과 정직은 사실상 같은 것이다. 겸손한 사람이란 진리 전체에 대해 정직한 사람이다. 당신과 나는 얼마 전 세상에 왔고 얼마 후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인생에 대한 유일하고도 정직한 반응은 겸손한 반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주기도의 청원대로 용서와 죄사함을 알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이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자신을 낮게 여기고 고민을 인정하고 건설적 비판에 마음이 열려 있습니다. 말석에 앉으라는 예수님 말씀을 받들어 그들은 남들이 자기를 말석에 앉혀도 놀라거나 불쾌해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과 수용과 용서와 죄사함 받은 자임을 신뢰합니다. 자신의 본성적 빈곤을 알기에 하나님의 자비에 마음껏 자신을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바로 그 겸손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당신에게서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9). 그분의 겸손의 비결은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그분은 온전히 아버지에게 매혹되어 사셨습니다. 철저히 자신을 잊고 하나님을 위해 사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 안에 사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9).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안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겸손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겸손은 처절한 깨어짐에서 시작됩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박차고 유산을 챙겨 먼 타국으로 떠나 방탕한 삶으로 모든 돈을 탕진한 둘째 아들의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워야 하는 몰락의 자리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깨어짐의 자리, 자신의 죄 된 모습을 보고 절망하는 자리야말로 은혜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향한 출발점입니다.

하지만 비참한 지경이 되어도 자아는 쉽게 소멸되지 않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꾼이라는 해결책을 생각해 냈습니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 말대로 그에게도 일말의 자존심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자아는 끈질깁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그 자아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죽이고 버릴 수 없습니다. 오로지 아버지의 자비에 감동하여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하는 그 순간에만 자아를 버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남은 인생을 아버지를 위해 살도록 결심하게 만들었습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도 그렇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자비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된 과거를 떠올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과거를 문제삼지 않습니다. 그의 중심은 온전히 아버지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중심은 아버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힘으로 자기를 위해 사시지 않고 아버지의 측량할 수 없는 돌보심과 자비에 의존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아셨기에 그분 또한 긍휼한 마음으로 모든 이들을 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자신을 경건하다고 여기고 마음 깊은 곳의 죄를 보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구원의 손길은 우리에게 미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은밀한 죄들까지 드러나게 됩니다. 따라서 죄에 대한 회개는 일회적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해지고 은혜가 깊어질수록 죄에 대해 민감해지고, 마침내 자신을 온통 감싸고 있는 죄를 발견하고 그 죄에 속수무책인 자신에 대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힘든 과정이지만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게 되고 복음대로 살 수 있는 겸손한 하나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주기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제자라고 착각하는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떠났을 때 베드로가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여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마 19:27).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은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지도 않고 주님을 제대로 좇지도 않으면서 자신을 제자라고 믿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참 제자가 된 이후에도 자신의 죄를 더 깊이 깨달아 절망을 경험하고 겸손하게 주님을 향하는 사람만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제대로 드릴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한 절망은 참된 제자가 되어 복음을 살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필수 과정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청원의 의미를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은 깨달음이 있는 사람인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스스로 죄를 극복할 수 없는 무력함과 죄에 사로잡힌 자신에 대한 절망이 없는 사람은 온전히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습니다. 겸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주기도의 청원은 교리 안에 갇히고 맙니다. 주기도의 청원들은 교리가 아닙니다. 제자들의 실천 사항입니다. 날마다 용서하면서 자신의 죄를 더 깊이 깨닫고 그때마다 주님 향한 마음이 깊어지면서 주님의 겸손을 각자의 심령에 새기게 될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가 우리 삶의 고백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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