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공동체

필자의 머릿속에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기교회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받은 제자들의 공동체로서 진정한 모습의 공동체입니다. 오늘날 그와 같은 모습의 공동체를 보기 힘듭니다. 하지만 비슷한 모습의 공동체들은 존재해 왔으며 유무상통하는 그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노력의 흔적들은 곳곳에 존재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더 민감해지고 공동체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하면 할수록, 많은 것을 포기하고 깊은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 마침내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기교회의 모습이 결코 일회적인 현상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삶을 믿고 그것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며, 하나님 나라가 그것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이미 이뤄지고 있다면, 그 모습은 바로 초기교회의 모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진지하게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공동체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어 있습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영적 성숙도가 저마다 다르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에 관한 많은 시도와 고민을 했던 장 바니에는 "공동체를 사랑하면 공동체가 깨진다. 그러나 형제를 사랑하면 공동체가 생겨난다."고 말했습니다. 공동체의 비결은 사랑입니다.

용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랑할수록 상처를 더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일정 거리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거리를 두지 않습니다.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사랑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사랑이 세상 사람들의 사랑과 다른 점은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는 끊임없이 깨어지고 갈라지는 사랑을 이어주는 접착제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라는 주기도의 청원에는 용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는 한 편의 용서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큰 주제이지만,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이야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초기 교회의 역사 가운데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성령을 속일 수 없다는 이야기로만 알아듣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공동체를 보호하시려는 성령의 손길이 숨어 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밭과 집 있는 자들이 그것을 팔아 그 판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의 예로 바나바를 들었습니다(행 4:32-37).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는 바로 그 다음에 나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진심으로 바나바처럼 행동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소유를 팔고 보니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했던 베드로는 그 사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책망하자 엎드러져 혼이 떠났습니다. 베드로는 소유를 판 돈을 발 앞에 놓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그것이 전부냐고 물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다' 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혼이 떠나간 것은 그들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성령공동체에서도 사람들은 실수하거나 잘못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관계를 왜곡시키고 깨뜨리는 사단의 도구입니다. 사람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쓰러지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 모든 행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도 용서해야만 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용서를 받으려면, 사실대로 말해야 합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이 성령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진 초기 교회 공동체는 타락의 빌미가 되었던 거짓이 자리매김해서는 안 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하나님 백성들에게는 거짓이 없어야 했습니다. 거짓 없이 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서, 인간들에게는 낯설고 힘든 용서라는 신적인 방식이 일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은 요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용서라는 것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관계의 회복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가장 큰 특징은 관계 회복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을 받으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께로 달려갈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인간관계도 회복됩니다. 선악과 문제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후 인간관계 역시 단절되었습니다. 이후 인간들의 관계는 지배와 통치로 이루어졌습니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지배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지배관계는 타락한 인간들의 질서를 위한 차선책이었습니다. 그것이 차선책인 것은 지배관계는 항상 희생양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지배관계가 해체되는 곳입니다.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사랑하고 섬기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인간관계의 회복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지배가 사라진 곳에서 진실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그곳에서 인간의 존엄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한 인간, 한 인간이 참된 인간으로 대접 받기 시작하는 곳입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주님의 말씀 또한 그곳에서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진리가 됩니다.

인간관계의 참된 회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가치관이 변해야 합니다. 행동이 변해야 합니다. 마침내 속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성숙의 기간은 사람들마다 다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또한 부족한 인간들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지니고 있고 인내에 실패하고 사랑에 실패하는 과정적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도 섭섭해 하고 상처를 입습니다.

그런데 그 해결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용서입니다. 관계의 실패를 용서라는 끈이 이어 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 회복의 중심에 용서가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일상이며 만만치 않은 과제인 용서를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는 청원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도리

그런데 용서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은 그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의무는 짐이 되고 강박관념이 됩니다. 용서는 의무가 아니라 자발적 동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하나님 백성의 도리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의 매우 중요한 특징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I"에서 가장 먼저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자신의 죄라고 했습니다. 그 죄에 대해 우리는 속수무책인 존재이며, 하나님 앞에 무가치한 사람이며,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의 제자가 되었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면, 우리는 결코 자신을 위해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 공동체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행합니다.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

이제까지 말한 내용을 잘 보여 주는 말씀이 마태복음 18장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천국에서는 누가 크냐고 물었습니다. 세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천국을 대하는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앞에 세우신 후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3)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무가치함을 알지 못하는 자는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들의 용서에 관한 질문입니다. 베드로는 형제를 일곱 번 용서하면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율법은 형제들의 죄를 세 번 용서하라고 권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수인 일곱 번 용서하면 많이 용서하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490번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완전수인 7에 십을 곱한 수에 7을 곱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무한정 용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는 그러므로 용서의 나라입니다. 끊임없이 용서가 선포되는 곳,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한 관원이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졌습니다. 그 금액은 관원의 능력으로는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습니다. 빚을 진 관원은 임금의 자비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쌍히 여긴 임금은 그 관원의 빚을 완전히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빚을 탕감 받은 관원이 돌아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빚을 갚으라고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은혜 받은 자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동료 관원에게서 받아야 할 돈은 임금에게 탕감 받은 돈의 육십만 분의 일에 불과했습니다. 어리석은 관원은 큰 은혜를 경험하고도 작은 은덕을 베풀기를 거절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임금은 노하여 다시 빚을 갚으라고 명한 후에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23-34).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용서의 의미를 깨달았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조건이 아니라 은혜 입은 자의 마땅한 도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용서의 나라입니다. 끝없이 용서가 선포되고 받아들여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라는 무한한 자비를 경험한 사람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도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백성들에게 놀라운 권한을 맡기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아가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용서하고 용서 받은 사람들이 한 뜻이 될 때 그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루게 하신다는 놀라운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용서란 힘든 의무가 아니라 마땅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도리입니다. 용서를 하면 할수록 그것을 통해 신적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고 그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되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는 단순히 죄 사함을 위해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기도입니다. 겸손해지기 위한 기도입니다. 무엇보다 용서가 일상이 되어야 하는 성령공동체가 함께 드려야 할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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