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9)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부분을 쓸 즈음 정신적 위기에 직면했다. 왜 사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해답을 찾지 못한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가 철도로 뛰어들어 자살로 작품을 마감한 것도 그의 사상적 위기와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인생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해 허우적거리던 작가는 50세에서 54세까지 “두려움과 혐오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젊은 시절에 저지른 죄악을 반성하며, 기독교적 가치에 최우선 순위를 둔 『참회록』 쓰기에 골몰했다.

이즈음 작가는 39세에 발표한 『전쟁과 평화』, 49세에 완성한 『안나 카레니나』와 같은 걸작을 스스로 인간을 해롭게 하는 예술이라고 비판하면서, 전 세계 대부분의 소설은 해로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랬던 그가 초고만 쓰고 그대로 방치해 두었던 『부활』을 완성하여 세상에 내놓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바로 기독교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러시아 정교회에 속하지 않은 성령부정파 교도들 즉 두호보르 교도들은 부패한 종교계를 비판하고, 원시 기독교로 귀환하자고 주장하면서, 비폭력, 만민동포주의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들의 움직임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 러시아 정부는 이들의 집을 불태우고 농토를 유린하는 잔학행위를 벌였는데, 작가는 이 두 집단의 중재를 위해 애쓰다가, 이들이 캐나다로 떠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냈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었다. 4,000명의 두호보르 교도들이 안전한 곳으로 이주하기 위해선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것이다.

작가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초고 상태의 『부활』을 완성해 1899년,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니 두호보르 교도들에 대한 애정이 없었더라면 이 작품은 이 세상 독자들과 만나지 못했을 것이며,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은 발표 계기부터 기독교와 관계를 가진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혹자는 톨스토이의 『부활』에 나오는 부활이 사후에 다시 살아나는 영생에 관한 것이 아니기에 전적으로 기독교 문학은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이 작품의 부활은 정신적 갱생, 즉 “영혼의 대청소”를 통한 양심의 부활과 그에 따른 행동으로, 실천사상과 관련된 부활을 뜻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로망 롤랑이 지적한 대로 “그의 예술적 성서이며 최후의 불꽃”이며, 그 어느 소설보다 깊이 있는 기독교적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기독교적 사유가 이 작품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문학 시간에 종종 모범 소설의 도입 부분으로 인용되기도 하는 『부활』의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한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비좁은 공간에 모여서 서로 아옹다옹하며 살고 있는 땅을 아무리 못 쓰게 만들려고 애를 써도, 땅에서 아무것도 돋아날 수 없게 하려고 아무리 돌을 깔아도, 조그만 틈바구니로 올라오는 새싹을 아무리 짓이겨 버려도, 석탄이나 석유 연기로 환경을 아무리 오염시켜도, 자라는 나뭇가지를 꺾고 짐승과 새들을 살 수 없게 쫓아버려도, 도시에 돌아오는 봄의 기운을 막을 수는 없다. 따스한 햇볕이 도시에 내리쬐면, 풀은 생기를 되찾아 움트고, 뿌리만 남아 있던 가로수의 잔디는 물론, 포석 틈새에서도 여기저기 파란 새싹들이 돋아났다. 자작나무, 포플러, 벚나무에도 찐득하고 향기로운 새 잎이 펼쳐졌고, 보리수에서는 새 움이 막 벌어지고 있었다.”(『부활』, 소담출판사, 장정희 옮김, 2002, 상 7-8쪽)

“봄을 막을 수는 없다.”라는 서술에는 신의 섭리와 인생에 대한작가의 의도적인 대비가 함축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봄은 신성성과 연결되면서 양심을 저버린 인간의 파괴적인 욕심과 상충한다.

“그러나 사람들은-어른들만은-자기 자신을 속이고 괴롭히며, 남을 괴롭히는 불행한 짓을 그치지 않았다. 그들이 신성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봄날의 아침도 아니고 만물의 행복을 위해서 주어진 신의 세계의 아름다움도 아니고 평화와 화합과 사랑으로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그런 아름다움도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지배하기 위해서 그들 자신이 생각해낸 일들만 신성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상 8쪽)

나아가 작가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절대성이 아닌 시간성, 즉 상대성에 그 근간을 두는 것으로 발전한다.

“널리 믿어지고 있는 아주 흔한 선입견은 사람은 제각기 자기 고유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선인, 악인, 영리한 자, 어리석은 자, 활동적인 자, 무기력한 자 등으로 나뉘어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사람을 그렇게 명쾌하게 나눌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 저 사람은 나쁠 때보다 선할 때가 많다든가 어리석을 때보다 영리할 때가 많다든가 무기력할 때보다 활동적인 때가 많다는 식으로, 또는 그 반대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 대해 전적으로 선량하다든가 영리하다든가, 혹은 악인이라든가 바보라는 식으로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상 268쪽)

사실 인간은 불변적 존재가 아니다. 시간의 틀과 상황에 따라 언제든 변화할 수 있는 가변적 존재가 아닌가. “강물은 어디에 있든 같은 물인데 어떤 곳을 지날 땐 좁고 물살이 빠른 물이 되고, 어떤 곳을 지날 때 넓고 물살이 느린 물이 되고, 차가워지기도 하고 따뜻해지기도 하”는 작가의 강물 비유를 환기해 본다.

이 작품은 네흘류도프가 램프 불빛 아래서 읽은 성경 말씀과 그에 따른 묵상으로 끝난다. 중요하게 부각되는 말씀 중 하나는,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 용서해줄까요, 라고 베드로가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한 답변인데, 작가는 이를 무서운 악에 갇힌 삶에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십자가의 본질과 연결한다.

“죄 없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벌을 주거나 바르게 가르치거나 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도 없기 때문에 언제든 누구나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하 331쪽)

바람직한 사회질서의 유지와 인류의 구원은 법적 재판이나 정죄에 있지 않고, “연민과 사랑”을 품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부활』은 “예언적 현자”로 일컬을 만한 삶을 살았던 작가 톨스토이의 마지막 소설이다. 물론 이 작품은 지나치게 교훈적이어서, 그의 대표 소설인『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에 비해 문학성이 뒤진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당대 러시아의 사회구조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사회 참여적 관점으로 보나, 신앙적 인격의 최고봉을 이룬 네흘류도프와 카튜샤를 보나, 로망 롤랑의 말대로 “예술적 성서”로서의 가치가 있음이 확실하다.

 (* 인용 부분에서 도착어의 유연함을 위해 필자의 수정이 있었음을 밝힘. 예를 들면 ‘미신’을 ‘선입견’으로 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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