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으로 보는 분별의 흑역사 9

 

인간의 몸을 빌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첫 번째 그리고 으뜸되는 사역이, 본인이 왜 하나님에 의해 이 세상에 보내졌는지(정체성의 문제) 분별해야 했고, 하나님의 뜻대로 죽기까지 행해야 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제자들의 시대를 맞아 그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에게 분별의 지혜를 직접 전수하는 것도 필수불가결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해나가는 본인 자신의 분별도 분별이거니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를 향해서도,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을 위해서도 분별의 지혜를 강조하셨다.

예수님은 정돈된 회당에서 종교주의자들의 입맛에 맞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큰 소리로 설파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시장 바닥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시면서, 안식일까지 어겨가며 환자를 고치면서, 인간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바다 위를 걸으면서, 가나안의 잔칫집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상에서, 생사가 걸린 인간들의 문제에 대해 때로는 치유와 기적으로, 때로는 칭찬과 꾸짖음으로, 때로는 뚱딴지 같은 비유의 말씀으로, 제자는 물론이고 그를 따르는 모든 무리가 이미 온 하나님 나라에서, 아니면 곧 올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분별되는 삶을 살기를 바라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바라는 분별은, 현실과 동떨어진 고고하고 근본적인 영성이 아니었다. 낮은 자들과 함께했던 예수님의 삶이 보여줬듯이, 가장 현실적이되 세상에 속하지 않고, 현재를 살되 주님이 다시 오실 미래를 갈망하는, 구분되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자들은 무엇보다 예수님이 세상에 왜 오셨고 왜 죽으셔야 했는지를 분별해야 했다. 문제는 그 누구도 주님이 죽으시기까지, 그리고 다시 살아나시기까지, 진정하고 유일한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1-4; 막 8:31-9:1; 눅 9:22-27).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막 16:9-13).

예수님의 제자들은 도대체 지난 3년간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 그들의 분별력은 왜 항상 제자리였는가? 그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다시 만나고, 부활의 예수님이 직접 몸을 만지게 하고, 떡을 떼시기 전까지 그를 알아볼 수 있는 분별의 영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 분별은 우리가 행위로 얻을 수 있는 성과가 아님이 분명하다. 주님이 먼저 오심으로, 주님이 먼저 허락하심으로, 주님이 먼저 동행해 주심으로, 주님이 먼저 몸을 내어 주심으로, 주님이 먼저 말을 거심으로 얻어지는 온전한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사역은 열두 제자만 위한 것이 아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1:15) 여기서 귀 있는 자는 세상의 모든 민족을 포함한다. 하지만 귀를 열어 듣는다고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제자이든, 따라다니던 무리이든, 오늘을 사는 우리이든 ‘모든 듣는 자의 분별’을 요구한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별하는 영, 분별의 영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마 13:13). 사복음서에 등장하는, 약 27번의 예수님의 직접적인 설교(예, 간음하지 마라(막 5:27-32)) 횟수만큼 정확히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 등장한다.

예수님은 왜 하필 비유로 말씀하셨을까? 참 제자와 거짓 제자를 가리기 위해서?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마 13:11). 아니다! 예수님만 아시는 천국의 비밀을 함부로 공개하기 싫어서 은밀히 감추려고? 아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당시 유대식 스토리텔링의 한 형식이었다. 이 비유의 말씀 대상은 열두 제자만이 아니라 모든 귀 있는 자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하늘 나라의 이야기를 세상적이고 일상적인 주제를 가지고 말씀하신 것이다. 물론 비유에는 비일상적인 요소들이 있지만 비유나 대조의 형식을 이용해, 어떻게 하나님이 일하시는지를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돕는다.

하지만 비유의 뜻은 분명하지 않고 그 목적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비유는 우리의 생각 패턴을 바꿀 것을 요구하고, 더욱 깊게 문제를 파고들라고 도전하기 때문이다. 왜?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고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겼기 때문이다(마 13:15). 그래서 더욱 비유는 한 번 들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비유를 통해 자신을 의심하고, 문자적으로 쉽게 받아들이지 말고,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에 대해 영적으로 탐구하라고 부추기신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의 발로나 문자적인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

따라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한 번 읽고‘ 아멘’하고 끝나선 안  된다. 쉬운 답을 도출하려고 무리수를 두어선 안 된다. 예수님을 만난 후, 비록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예수님의 주님됨을 고백하지 못했으나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슬퍼하고 근심하며 돌아가는(막 10:22) 부자 청년처럼, 비유의 말씀을 곱씹고 고민하고 고백할 때, 그 말씀이 살아 움직여 우리의 삶을 통째로 바꾸어 놓는다. 비록 부자 청년은 돌아갔으나, 예수님을 만난 이후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라!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이 믿은 것은 눈에 보인 것이지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지적, 영적 호기심은 결코 발전하지 못했다. 그들이 이해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은 피상적이었다. 그들은 비유의 말씀들을 너무 쉽게 받아들였다. 그런 피상적인 믿음의 결과는 배반이었다. 정작 예수님이 그들을 필요로 했을 때, 그들은 도망쳤다.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분별하지 못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 2천 년이 지나도 왜곡되지 않고, 쇠하지 않고,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비유의 신비다. 마음 문이 열리고 귀가 예민해지고 눈이 밝아졌을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

예수님 제자 되기가 그리 쉬운가? 제자로서 분별하며 산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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