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사회적 죄악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울고 있는 사람은,
까닭 없이 이 세상에서 울고 있는 사람은,
나 때문에 우는 것이다.

불멸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엄숙한 시간> 일부입니다. 이 시구가 사회적 죄악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죄에 대해 민감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거나 법에 위반되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죄의 개념 자체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죄란 하나님의 마음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동으로 드러나건 드러나지 않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순간, 우리는 죄의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의 범위가 넓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고 그분의 공의를 세상에 실현해야 하는 사명을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죄란 포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복의 통로가 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죄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마음에 합하지 않은 삶은 곧 죄가 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주기도의 청원을 묵상하면서 반드시 사회적 죄악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사회적 죄악에 대해 침묵할 수 없습니다. 사회적 죄악에 대한 침묵은 곧 우리가 구원 받은 목적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보다 먼저 하나님 백성으로 부름 받았던 이스라엘이 그것을 잘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역할과 그들 속에 침투한 사회악

이스라엘은 이방의 빛이 되어야 하는 사명을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힘으로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기 위해 선택받은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나라가 되어 세상의 불의를 드러내고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이 진리이며 참 소망인가를 보여 주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그러한 자신들의 사명을 망각했습니다.

가나안 정복을 시작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원주민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그들의 도시들과 부동산을 인수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부동산을 사유재산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일종의 매도상품으로 다루었습니다. 이스라엘 농부들은 그들과 접촉하면서 개인적으로 가나안 사람들의 부동산을 사들이고, 그들이 정복한 경작지와 목초지가 고스란히 이스라엘 수중에 들어오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 가지의 토지 소유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땅 분배를 통해 받은 각 지파의 몫은 그들의 기업이었지만 그 땅의 소유권은 하나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래를 통한 땅과 땅 분배 이후에 전쟁을 통해 얻은 땅들은 개인 소유였습니다. 이처럼 사유재산이 이스라엘 공동체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면서 평등과 균등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파괴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이 안정되면서 경제적 비중이 시골로부터 도시로 옮겨가기 시작했습니다. 도시에는 무역 시장들과(왕상 20:34), 군사 요새들과(왕상 9:19), 왕실 행정기구들이(왕상 4:7)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도시들의 필요에 따라 대외무역이 번성하기 시작했는데 도시의 토지를 관리하게 된 사람들이 무역 이익을 장악하게 되자, 그것 역시 이스라엘의 균형을 깨뜨리고 하나님 나라의 기반을 허물었습니다. 부의 편중으로 인한 도시 집중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그에 따라 시골의 부동산이 안락한 도시생활을 좋아하는 소수 지주들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사 5:8). 농부들은 토지 지분권을 잃고 지주들의 농장에서 농사 짓는 노예와 품꾼이 되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 이스라엘이 세상의 방식을 따라 왕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 어려운 구조가 된 것입니다. 인간 왕이 통치하는 나라는 희생의 구조가 될 수밖에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왕을 세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세상의 번영과 안락을 부러워하여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그들의 왕을 세웠습니다. 온전한 샬롬이 실현되기 어려운 구조가 된 것입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아합 왕과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는 어떻게 이스라엘에 불의가 판을 치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스냅사진 같습니다. 간악한 왕비인 이세벨이 사람들을 동원하여 합법적 구실로 나봇을 살해하고 지파의 기업으로 받았던 땅까지 빼앗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은 더 이상 모두가 평등한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었습니다. 빈부격차가 뚜렷해졌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사라지고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훼손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 중에 가난한 자들이 등장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무심코 지나칩니다. 역사 속에 가난한 자들이 늘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의 사고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초대교회 기사에서 보듯이 핍절한 사람이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무도 가난하지 않고 부족한 것이나 갈등이나 불균형이 없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회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며 불순종에 의해 드러난 사회악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지 않는 나라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난한 자들이 등장했다는 것은 인간의 죄를 드러낼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이상에 따라 살아갈 능력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신 15:4,1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의 진의는, 하나님 나라에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을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인정하고 따르지 않는 무리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 끊임없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바른 길로 돌아오라고 촉구하셨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왕도 백성들도 없었습니다. 선지자들은 늘 외로운 자들이 되었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향하여 목이 곧은 백성이라며 그들의 죄악을 질타하셨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이 귀를 기울인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했을 때에만 그들은 아주 조금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선지서의 메시지는 여호와의 말씀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선지서 외에도 구약 성경 전체에 하나님의 공의에 관한 메시지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이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되는) 작게 하여 세겔을(추는)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내가 저희의 모든 소위를 영영 잊지 아니하리라"(암 8:4-7).

정부 관리들은 토지 투기와 소송 사기만 조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외무역도 관장하며 수요를 촉진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류 계급의 필요에 따라 그것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있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우선 자기가 말하는 상대들의 정체를 밝혀 그들이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는 자들이라고 지적한 다음(4), 그들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5-6). 그들의 말이 그들의 행실과 동기를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파는 곡식의 되를 작게 만들었고, 사는 사람들의 은돈을 다는 저울의 눈금을 늘였으며, 심지어 잿밀(밀가루 찌꺼기), 곧 기울과 등겨까지 팔아 이득을 남겼습니다.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11).

이스라엘은 더 이상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로서 이스라엘의 생명이 다한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을 때, 그분의 공의를 망각할 때 기근이 닥칠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일 뿐 아니라, 새 이스라엘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똑같은 상황이 우리 가운데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결핍이 없는 풍요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왕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 속에서 이루어지는 샬롬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왕으로 여기지 않거나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이스라엘처럼 탐욕에 이끌려 우상숭배자가 되어 마침내 파국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존재가 명확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거듭 가난한 이들의 편을 드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편애하시는 것은 그들이 사회악의 희생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실종되었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희년 선포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신 설교 말씀이 이사야서입니다. 거기에는 새로운 왕으로서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명이 담겨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인용하시면서 세 가지 요소를 강조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둘째, 당신의 사명이 가난한 자, 눈먼 자. 노예 된 자, 억압당하는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이 일이 곧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폭탄 선언을 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

예수님의 취임 설교에 해당하는 이 말씀은 영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쪽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배경이 되는 구약 성경을 보면 이 본문이 사회 현실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폭넓은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은혜의 해"는 구약에서 말하는 희년(Jubilee)를 가리킵니다. 본질적으로 이 설교는 희년의 선포입니다.

희년에 담긴 의미

율법에 따르면, 50년째 되는 희년에 거대한 쇄신이 이루어졌습니다.

"제 오십 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 돌아갈찌니며 그 오십 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레 25:10-12).

50년 주기로 이루어지는 혁신은 땅 소유권을 원래대로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희년은 탐욕스러운 호족들이 땅을 사들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일을 막았습니다. 비록 49년 동안 땅을 사고파는 일이 이루어지더라도, 희년에는 적어도 한 세대에 한 번 땅의 소유권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중간 기간에 실제로 땅을 산 것이 아니라 땅의 사용권을 산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희년이 가까울수록 가격은 낮아졌습니다. 희년까지 추수할 수 있는 횟수에 따라 가격이 계산되었기 때문입니다(레 25:13-16).

희년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튼튼하게 떠받치는 신학적인 원리들입니다. 희년 비전이 요구하는 것이 사회 변혁, 곧 사회 질서를 뒤엎는 일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희년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사회적 청사진으로서, 불평등을 낳는 세 가지 요소들을 다룹니다. 즉 (1) 땅의 지배는 자연 자원을 이용할 권리를 뜻하고, (2) 노예의 소유는 생산에 필수적인 인간의 노동을 상징하며 (3) 돈을 빌려주는 일은 자본과 신용에 의한 경영을 뜻합니다. 이 세 가지를 50년마다 제로로 만드는 것입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이 세 가지 자원, 곧 자연 자원, 인간 자원 그리고 재정 자원을 어떻게 이용하고 분배하느냐에 따라 정의의 균형이 깨지거나 유지됩니다. 현대에는 과학기술이 평등을 좌우하는 네 번째 요소로 등장했습니다. 희년에 담긴 신학적 원리에는 불평등과 불의를 해결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희년 본문들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요소들의 주인이 되신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땅을 팔 수 없는 이유는 "땅은 내 것"(레 25:23)이라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정해진 때가 되면 종들을 풀어 주어야 하는 이유도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바 나의 품꾼인즉"(25:42), 다시 말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땅과 백성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함부로 다룰 수 없고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책임을 부여받은 청지기일 뿐입니다.

우리는 땅과 사람들을 탐욕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희년의 바탕에는 청지기 신학이 있습니다. 우리는 땅과 사람을 포함한 모든 자원들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일시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서 그것들을 바르게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2) 하나님의 해방에 대한 응답

희년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로운 해방과 구원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신 일을 회상하면서 감사의 표시로 자기들이 누리는 자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빚을 탕감하고, 노예를 풀어 주며, 땅을 되돌려 주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눈에는 노예를 풀어주는 일이 고결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희년의 규정은 개인의 의로움을 치켜세우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또 노예를 풀어 주는 일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자유를 주어 내보낼 때 그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을 주어서 내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신 15:13-14).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자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떠나는 이스라엘이 빈손으로 떠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재물과 가축을 가지고 광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회 정의라고 할 수 있는 희년을 행하는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해방하셨다는 기쁜 소식에 대한 응답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희년 실천

새 하나님 나라 백성들인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희년 선포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고 역사 속에서 그것을 실현했습니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줌이러라"(행 4:34-35).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가난한 자 없는 사회가 초대교회 성도들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성경은 보고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청원에는 희년을 실천함으로써 막을 수 있는 사회적 죄에 대한 인식이 들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없는 사회는 이상이나 꿈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곳에서는 당연한 현상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개인의 죄는 아니어도 최소한 사회적인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녕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주기도의 청원을 드리고 있다면, 우리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심판의 근거로서 더욱 중요한 사회적 죄악

예수님의 희년 선포는 그 대상이 새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들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마태복음 25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거나 돕지 않는 것이 주님을 돕거나 돕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가난의 갖가지 모습 속에서 우리는 고통 받는 종이신 그분을 만나는 신비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최후의 심판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실 이 비유는 신약에 기록된 유일한 심판에 관한 자세한 묘사입니다. 여기서 심판의 기준이 우리의 생각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각 개인의 그리스도와의 관계일 것이지만, 심판의 기준은 전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에 의해 드러나는 것처럼, 개인의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진실성이 타인과의 관계에 의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회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면서 타인에게 헌신한 사람들, 타인의 행복에 실천적인 관심을 나타낸 사람들은 의인으로 인정받아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인 사람들은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 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42-43)라고 말씀하시며,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45)는 이유로, 그들에게 "저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40)고 선고하셨습니다. 심판의 근거가 바로 사회적 죄임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우리의 청원에는 사회적 죄악에 대한 관심이 반드시 들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변에 핍절한 사람이나 고통 받는 사람이 있다면 최선의 도움을 제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 대해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사회적 죄악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죄입니다. 사랑의 선택 기준은 분명합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들을 섬기고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작은 도움밖에 줄 수 없을 때에는 그것을 애통해 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고 주님 앞에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할 때, 개인의 죄뿐만 아니라 사회적 죄까지 사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변에 가난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우리가 돌보아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 자신이 가난하다면 그 역시 우리가 돌보아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다.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난당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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