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큰아들을 특별하게 여기셨다. 둘째, 셋째보다도 더 특권을 주셨다. 재산을 상속하게 되면 큰아들은 3분의 2의 몫이 배당되었다. 부모를 모셔야 하는 의무와 특권이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있다. 큰아들은 제사장의 직무를 이어가게 되었다. 말하자면 영적 지도자가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비유 가운데 ‘돌아온 탕자’(눅 15:11-32)는 예수쟁이가 아니어도 대부분 잘 안다. 게다가 이 비유는 <조각소설>로서도 인류문화에 길이 남는 명작 아닌가. 그토록 짤막한 소설에 그토록 위대한 진리를 담아 놓은 작품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이 탕자의 비유는 어쩌면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염두에 두시고 재구성하신 것은 아닐까(창 25:27-34). 서로 비교하면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형제 사이의 갈등, 재산과 음식 문제, 부모로부터의 상속, 둘째 아들이 첫아들을 영적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 무엇보다도  ‘아우만도 못한 어리석은 형’이라는 점에 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회개하고 돌아왔지만 큰 아들은 끝내 구제 불능이었다. 그리고 둘째인 야곱은 마침내 팥죽을 팔아서 ‘별 실익도 없을 법한’ 장자의 명분을 사들였다. 그로 인하여 ‘아브라함,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성경에 반복해 나온다.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 이어졌고, 예수님의 열두 제자로 영통이 계속되었다.
  예수님에게도 에서의 유혹이 있었다. 세례를 받으신 뒤에 40일 동안 금식하셨다. 목숨을 잃을 정도의 배고픔이었다. 그래서 교활한 사탄의 첫 유혹이, ‘이 돌들로 명령하여 빵이 되게 하라.’ 바로 그것이었다.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라.’는 야곱의 상술 그대로다. 물론 야곱이 사탄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만약 그분께서 ‘돌들을 빵으로 변형시켜’ 배가 꽉 차도록 잡수셨다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펑펑 퍼 돌리셨다면 경제 대통령이 되셨을 터였다 (참조:요 6:12-15). 그러나 예수님은 에서와는 정 반대이셨다. 왕으로 삼으려는 민중운동을 단연 거부하셨다. 하나님의 외아들로서의 명분을 결단코 헌신짝처럼 버리시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에 우리 모국 한반도에 화해의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다. 좋은 일이다. 남북한 사이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 나라가 속히 한반도에 건설되어야 한다(사 2:4).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결코 자유를 팔아서 통일을 사들이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 통일헌법을 제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잘라낸다니 이게 될 법한 일인가. 특히 목사로서 단언해 말한다. 신앙의 자유가 없는 통일은 결코 안 된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외쳐야 한다. 그리고 하늘을 향하여 십자가 지고 기도해야 한다. 

<대표저서:목회자의 최고표준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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