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광야는 자유인이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요, 생의 우선순위를 보게 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세 가지 체험을 하게 됩니다. 광야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기도 하고, 하나님께 반항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시험을 받거나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묶고 있던 것들로부터 벗어나 자유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광야의 체험을 통해 자유에 이르게 됩니다.

광야의 두 얼굴

광야는 두 얼굴을 가진 장소입니다. 무력함, 황량함, 외로움 등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매정한 얼굴을 지녔는가 하면, 섭리와 공급하심과 보살핌이라는 자비의 얼굴을 가진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이 두 얼굴을 체험합니다. 갈증과 배고픔, 다른 부족들의 위협 앞에서 매정함을 느끼지만, 그럴 때마다 광야 한가운데서 샘이 터지게 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다른 부족의 침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합니다. 우리의 광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광야의 두 얼굴 가운데 어떤 얼굴을 보느냐에 따라 생명의 존망이 결정됩니다. 매정한 얼굴만 본다면 절망에 빠져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이고, 자비의 얼굴을 본다면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받고 그분 안에서 평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얼굴에 믿음과 신뢰를 둘 것인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입니다.

위기(危機)라는 단어는 '위험'(危險)과 '기회'(幾回)라는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위기는 전환의 때입니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습니다. 위기는 파국이라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시선이 어디에 머물고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줄 것입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인간의 절망이 하나님의 기회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광야의 혹독한 현실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면, 우리 안에 더 이상 버틸 힘이 없고 능력의 한계가 환하게 드러나 절망에 빠진 그 순간이 새로운 시작의 기회요, 존재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축복의 시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이스라엘이 광야 길을 걷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광야의 삶 40년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들이 광야의 매정한 얼굴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광야로 들어서게 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시내 산으로 이끄셨습니다. 그 산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라는 부르심을 받은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이스라엘과 계약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한 구체적인 삶의 방식인 율법을 주셨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이 시내 산까지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한 달 반 정도였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신약의 성령강림 오순절과 마찬가지로 50일이 걸렸다고 생각합니다. 50일 만에 시내 산에 도착한 그들은 그곳에 여러 달 머물면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율법을 받습니다. 그리고 다시 행군을 시작하여 바란 광야에 도달합니다. 바란 광야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길목입니다. 바란 광야만 넘어서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꿈에 그리던 약속의 땅이 지척에 놓여 있었습니다.

애굽 탈출부터 그곳까지 이르는 데 소요된 시간은 불과 반 년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시점에서 이스라엘은 열두 명의 정탐꾼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냈습니다. 각 지파의 우두머리들로 구성된 최정예 멤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40일간 그 땅을 정탐한 후에 돌아와 보고하였습니다.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민 13:27).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그들이 가져온 먹음직스러운 과일을 보고 이스라엘은 환호했습니다. 드디어 자신들의 고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보고를 들으면서 그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28-29).

아낙 자손은 키가 장대 같은 거인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을 뿐 아니라 성도 견고하고 크다는 것입니다. 사방에 거하고 있는 가나안 거민들 중에 만만한 부족은 없었습니다. 그런 보고를 들으며 이스라엘은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동요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30).

갈렙이 담대하게 말했지만 열 명의 정탐꾼들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31-33).

정탐꾼들의 견해가 달랐습니다. 그런데 광야의 매정한 얼굴만을 보는데 익숙해진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보다 다른 열 명의 보고를 더 신뢰하였습니다. 그리고 절망에 빠져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밤이 새도록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14:2-3).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외치면서 모세 대신 다른 장관을 뽑아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논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옷을 찢으며 그들을 만류하였습니다. 그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7-9).

그러나 이스라엘 회중은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급기야 만류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여호와께서 크게 진노하셔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받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11-12).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을 떠나기 전 내리셨던 열 가지 재앙은 애굽의 신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애굽의 권세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이스라엘에게 똑똑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직접 그들을 멸하시려고 마음을 정하셨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을 설득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그러나 진실로 나의 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으로 맹세하노니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20-23).

그들은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애굽을 그리워하였습니다. '차라리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니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도 더 좋았을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원하는 대로 해주셨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자비한 얼굴을 보지 않고 매정한 얼굴만 보았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강한 오른 손으로 애굽의 바로와 모든 수호신과 그 백성들을 놀라게 하시면서 자기들을 탈출시키시고 홍해를 갈라 그들만 건너게 하신 그 놀라운 기적들을 떠올리지 못할 만큼 현실의 고통에 질식당하고 말았습니다. 광야의 매정함만 바라보고 집착하여 그릇된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을 구해내신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사고와 행동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사십 년 동안 광야를 헤매고 다니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을 통해 광야의 두 얼굴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위기에 처한 순간이 위험과 기회의 갈림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시련이 혹독할수록 광야의 자비로운 얼굴을 보면서 아바 아버지를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넘어지게 한 것

그런데 이스라엘의 어리석은 선택과 행동에 의아해집니다. 그들이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 직접 보고 경험하고도 그토록 빨리 잊어버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일까요?

우리가 광야의 자비로운 얼굴을 보지 않고 매정한 얼굴만을 본다면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삶을 기록한 출애굽기 15-17장과 민수기 11-18장을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이스라엘의 불평과 불만입니다. 거의 매 구절마다 하나님께 반항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하는 소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야는 이처럼 반항의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불평, 불만하며 반항하게 만든 것일까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섭리 속에 드러나는 광야의 자비를 보지 못하고 잊게 만들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의 원망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에 막 들어섰을 때 애굽의 병사들이 뒤쫓아 오자 이스라엘은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 14:11-12).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의 병사들을 수장시키신 하나님의 능력에 감탄했던 그들이 광야 길에 들어선 뒤 마실 물이 떨어지자, 또 다시 하나님께 대들고 따졌는데 얼마나 대들었던지 그 장소 이름이 '대들다. 혹은 반역하다.'란 뜻을 가진 마라였습니다(출 16:22) 또 신 광야에서는 먹을 것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는데 그 원망이 얼마나 노골적인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3).

그들의 원망 속에서 반복해서 메아리치고 있는 단어는 바로 애굽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의 매정한 얼굴만 보게 되었던 이유는 그들의 머릿속에서 애굽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몸은 애굽을 떠났지만 머릿속에서 애굽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단순히 물과 음식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광야의 삶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삶의 의미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해방도 좋고, 약속의 땅도 좋지만 이렇게까지 고생하면서 얻고 싶지는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소망하면서도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는 모습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부활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시려고 이스라엘을 광야로 이끄셨는데 그들은 인간적인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의 안위만 좇았던 것입니다. 광야의 힘든 과정이 싫었고 그것을 견뎌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에게 애굽이 의미하는 바를 깊이 고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광야길이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자유의 여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어 하는 애굽이란 과연 무엇을 상징할까요? 그것이 바로 세상과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속적인 성공과 부를 추구하는 마음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워하는 애굽의 삶은 고기도 구워 먹고 술도 마시고, 즐기고, 금송아지 옆에서 춤 추는 삶입니다. 강력한 세상의 유혹입니다. 이스라엘에 생겨난 산당은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오늘의 교회들에도 여전히 그 산당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교회 자체가 산당으로 변한 곳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 산당은 애굽을 그리워하는 이스라엘의 마음이 존재하는 곳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광야는 시험의 장소요, 유혹의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 성경 본문들에 자주 등장하는 '페이라조' 또는 '페이라오'라는 단어에는 '시험하다' 또는 '유혹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언뜻 유혹이나 시험이 그게 그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의미를 가려 쓸 필요가 있습니다.

'시험'은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지만 '유혹'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영어로 시험은 test이고 유혹은 tempt입니다. 시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유혹은 사단으로부터 옵니다. 우리가 유혹에 빠지는 것은 사단에게 미혹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지만 유혹에 빠지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인간을 인간답게, 당신의 백성을 당신의 백성답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유혹하시지 않고 시험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시험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시험 받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시험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의 뜻 또한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피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거쳐야 할 정련의 과정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주기도의 청원은 "우리를 유혹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로 바꾸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단련하시기 위해 우리를 시험하시는데 우리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청원하는 것은 어둠의 세력과 어둠의 세력에 미혹된 우리의 상한 심령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 달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단련시키기 위해 시험의 장소이기도 하고 유혹의 장소일 수도 있는 광야로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런데 광야가 하나님의 시험을 받는 장소가 아니라 마귀의 유혹을 받는 자리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애굽으로 대변되는 세상은 사단의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광야는 유혹의 자리가 아니라 시험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그 시험은 우리 마음을 제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희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사 1:25)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시험한다는 말은 흔히 "정제시키다." 혹은 "단련시키다."라는 말로 바꾸어 쓰기도 합니다.

하지만 살펴 본 바와 같이 광야는 유혹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단의 유혹을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근본적으로 타락한 존재들이고 부패한 마음을 가졌으며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뜻대로 행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광야를 십자가로

일단 광야 길에 들어선 사람은 계속 나아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광야를 떠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자체가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약속의 땅이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부터 내려올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기 전에 우리가 죽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은 천국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서의 광야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를 거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입니다.

광야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면 광야의 삶은 시험 기간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충실히 살려면 매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매일 우리의 삶을 십자가로 받아 소중하게 지고 가야 합니다. 그것은 단지 십자가일 뿐만 아니라 내 삶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소중하게 안고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를 지라.'에서 '지다'라는 헬라어는 '바스타제인'입니다. 그 단어의 첫 번째 의미는 '귀중한 것을 품에 안고 가다.'입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품에 안고 갈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십자가는 힘겹게 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귀중하게 품에 안고 가야 합니다.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그것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광야를 그와 같은 자세로 받아들일 때 광야는 귀중한 삶의 체험일 뿐 아니라 내 삶의 의미 자체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광야를 시험의 장소로 만들어나갈 때, 우리에게 인생은 힘겨운 짐이나 위기가 아니라 소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빚어 만드시고 변화시키셔서 당신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청원에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광야를 시험의 기회로 삼아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소중한 삶을 살겠다는 순종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인생은 광야입니다. 끊임없이 몰려오는 위기 속에서 우리는 어느 얼굴을 볼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의 삶을 우리에게 주시는 십자가로 소중히 부여안는다면 삶의 여정은 소중한 하나님의 시험 기간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심령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 자라갈 것이며 우리들 주변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며 그런 우리들은 빛과 소금으로 어두운 세상에 희망을 줄 것입니다. 그 마음을 담아 오늘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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