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죄사함의 은총

다음은 메리 포플린이 인도의 사랑의 선교회를 방문한 후 쓴 책 『지금 머물러 있는 곳을 더욱 사랑하라』의 일부입니다.

「사랑의 선교회가 운영하는 아동 센터는 부모가 원치 않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양부모를 연결해 준다. 마더 테레사는 선교회가 입양으로 낙태에 맞서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마더는 태아를 포함한 모든 생명을 신성하게 여겼다. 강력한 낙태 반대론자인 마더는 원치 않는 아이들을 선교회에 보내면 잘 돌보겠다고 호소했다. 미국에서만 매해 약 4,000건의 낙태가 발생한다. 전문가들은 낙태가 산모에게 미치는 신체적, 심리적 영향을 계속해서 밝혀내는 중이다.

이십대에 두 번이나 낙태를 한 나는 이런 현실을 잘 안다. 그리스도를 만난 뒤 많이 후회했다. 낙태 결정은 몸과 영과 혼에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야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게 되었다. 이후 몇 년간, 나는 끊임없이 회개를 반복했지만 하나님이 정말로 용서해 주셨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언젠가 가계의 치유를 위한 피정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중 한 시간에는 이런 과제를 주었다. 종이 한 장을 주면서 각자가 회개할 내용과 용서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보라고 했다. 우리는 저녁 예배 후에 기도하면서 그 종이를 불태워 하나님께 올려드릴 예정이었다.

나는 맨 윗줄에 두 차례의 낙태를 적었다.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집어 넣고 수도원 옆으로 흐르는 페코스 강을 따라 산책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속에서 한 남자의 음성이 똑똑히 들렸다. "너는 도대체 누구이기에 내가 이미 용서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느냐?" 나는 그 질문에 깜짝 놀라 멈춰 섰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혼란스러웠다. 잠시 후 몇 발짝 내디디니 또 음성이 들려왔다. 종이를 꺼내 목록을 한 번 들여다보고 발걸음을 재촉하려니 또 다시 음성이 들렸다. 나는 다시 멈춰 서서 이번에는 큰 소리로 외쳤다. "주님 도대체 제가 누구를 용서하지 못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주님이 마음속에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처음 회개했을 때 바로 용서했다.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지 말거라."

용서를 받으려면 죄를 고백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값없이 주시는 용서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라는 선물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출 때까지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결코 끝나지 않을 속죄 행위를 스스로에게 부과했다. 아이들의 이름을 수백 번도 지어보고, 동일한 죄를 끊임없이 고백하고, 나는 평생 후회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그분의 처분만 기다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단 용서받은 후에는 과거는 잊어버리고 소명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소명을 가로막는 악한 일을 하는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대부분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그분의 용서를 받기 위해 애쓰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성경이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는 증거를 나는 찾지 못했다. 주님은 내 자존심을 지적하고 계셨던 것이 틀림없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도대체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너를 이미 용서했다.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다." 그분의 용서를 단순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데, 나는 자존심 때문에 다른 자격 요건을 찾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이 죄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기 때문에, 용서를 받으려면 이 정도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더 테레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마더라면 이렇게 말씀해 주셨을 것 같다. "그 일은 너무 크고, 당신은 너무 작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맡기세요." (p.165-167)」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란 결국 구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메리 포플린처럼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의 긍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죄사함입니다.

메리 포플린이 경험한 것은 용서라는 선물을 받아들이는 은총입니다. 그녀가 그 은혜를 경험하게 된 것은 그녀가 자신의 죄를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가 주홍빛 같더라도 주님께 고백하면 흰 눈과 같이 깨끗해집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은 모든 것을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의 종노릇으로부터의 해방

그렇기 때문에 죄의 고백은 매우 중요한 하나님 백성의 일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죄가 문제 되지 않는 것은 그것을 주님께 고백하고 서로에게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잘못은 자신의 죄를 감추고 고백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대로 자신의 죄를 드러내고 고백할 때 우리의 죄는 우리에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죄는 더 이상 우리를 노예 삼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회개하고 죄를 고백하기 전까지 죄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죄는 우리의 주인이 되어 우리를 좌지우지합니다. 하지만 죄를 고백하는 순간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고백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주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이 말씀으로 우리는 죄의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죄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분의 용서는 영원한 용서입니다. 그분은 한 번 용서하신 것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죄의 고백은 은혜의 방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분의 크신 자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죄를 먼저 그분께 고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도, 수많은 시편 기자들의 고백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비하신 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그래서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일수록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자비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이해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게 베풀어지기 위해서 마련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베풀어지도록 간청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는 바로 그 청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경험되어야 합니다.

죄사함의 의미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세상을 거스르는 힘을 주지 못하는 것은 죄사함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지만, 사실 자신의 죄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죄는 은밀합니다. 성령의 조명 없이는 죄의 실체를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 지은 사람들을 경멸합니다. 강도짓을 한 사람들이나 흉악한 범죄자들을 보면서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이 그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볼 수 있는 은혜의 사람들은 그들을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자신의 속에서 죄의 뿌리들을 분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같은 상황에 처하면 똑같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그런 자신이 범죄한 사람들을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범죄한 사람들을 정죄하고 저주하는 대신, 긍휼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려면 많은 인생 경험들이 필요합니다. 좌절과 실패의 경험들이 필요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고독이 필요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자신의 실상을 온전히 보고,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순간 죄사함이라는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큰 사랑이며 자비이며 인내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절망과 깨어짐의 시간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무력함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2-25).

죄에 대해 무력한 자신을 보고 자기에 대한 절망을 경험한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대속의 의미를 깨닫고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 마침내 이렇게 선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이 해방의 기쁜 소식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죄사함이 의미하는 것들을 살펴봅니다.

1) 구원의 핵심

죄사함은 구원의 핵심입니다. 구원이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은 죄인인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영적으로 유익합니다. 구원으로 영생을 얻었다고 말하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으로 말하면, 우리는 영원하신 그분과 동행하는 삶으로 들어가 그분의 통치를 받는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죄는 관계의 단절을 초래합니다. 가장 먼저 죄는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단절합니다. 거룩하신 그분과 나 사이에 죄가 가로놓여 있으면 그분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그분께 죄로 물든 존재로는 다가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의로움을 덧입혀줄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바로 그러한 은혜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는 희생의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통해 우리가 의로운 존재라는 '칭의'를 선고 받고 은혜의 보좌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사함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단절로 이어집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뿐 아니라 인간관계도 단절시켜 놓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인간관계 회복으로 드러납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죄사함은 결과적으로 인간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화의 과정 속에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에 실패하고 여전히 상처 받는 존재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거기에서 사랑을 완성시키고 상처를 치유하고 관계를 이어주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마지막으로 죄사함은 나와 내 자아 사이를 회복시켜 줍니다. 우리는 로마서 7장에서 본 바와 같이 죄의 법 아래에서는 참된 인간으로 통합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게 됩니다. 죄가 나와 내 자아 사이를 갈라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통해 우리는 나와 자아를 통합시킬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죄사함을 통해 관계가 회복됩니다. 하나님에 이어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구원이란 죄사함을 통한 관계 회복입니다. 따라서 죄사함은 구원의 핵심입니다.

2) 아버지의 자비 체험

마음속에 품고 있는 하나님 상은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인생사를 건강하고 올바르게 대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상을 갖고 있는 사람은 경직된 태도로 대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경직된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 생활을 오래 하고 직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경직된 태도를 보입니다.

마음속에 품은 하나님 상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에서부터 선과 악의 이해, 그리고 일상의 삶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칩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생각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의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용서 체험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에 인생의 초점을 맞추고 죄를 지으면 감추려 듭니다. 그것이 경직된 태도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반복해서 말도 안 되는 죄를 짓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죄를 주님께 고백할 때 우리는 죄사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무리 크고 말도 안 되는 죄를 저질렀어도 하나님께서는 한없는 자비로 용서해 주시고 그런 일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우리를 대해 주십니다. 그러한 죄사함을 받을 때 그분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를 느끼고 그분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됩니다. 그분과의 사랑이 깊어지고 아빠라고 부르는 친밀한 아버지로 느끼게 됩니다. 아버지의 자비 체험의 중심에 죄사함이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3) 용서의 원동력

그와 같은 자비 체험은 용서의 원동력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닮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 용서하는 존재로 살아가게 됩니다. 과거에는 힘들고 어려웠던 용서가 그분의 용서를 체험한 이후에는 쉬워집니다. 용서의 경험을 쌓아가면서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우리 속에 있는 죄에 대해서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죄에 대해 민감해지고 죄를 발견하는 즉시 하나님께 고백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사함의 경험이 두터워지고 우리는 은혜의 사람, 사랑의 사람, 그리고 용서의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용서가 힘든 이유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용서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죄사함을 경험하면 자존심은 더 이상 우리를 움직이는 동력이 아닙니다. 죄는 주로 자존심을 자극하여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합니다. 죄는 우리의 심성을 알고 자존심을 자극하여 우리를 죄의 법 아래 사로잡습니다. 죄사함은 우리의 자존심을 무너뜨리지만, 실제로 우리는 존귀한 존재가 됩니다.

죄사함을 체험하면 우리는 더 이상 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백성들 간의 죄의 고백 또한 쉬워집니다. 죄는 점점 더 우리로부터 영향력을 상실하고 용서는 더욱 쉬워지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 백성 공동체로서 단단한 결속을 다지게 됩니다. 죄사함의 체험은 그런 의미에서 용서의 원동력입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선포하는 일들이 일상이 될 때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는 세상의 빛과 희망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청원은 신앙의 핵심 기도입니다. 용서뿐 아니라 죄 또한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해결 과제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나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데, 그 죄로부터의 해방이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고백하고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은 하나님백성들에게 고백할 때 우리는 죄사함과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죄의 법에 사로잡히지 않고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에 담겨 있는 의미들을 음미하며 진지한 태도로 기도할 때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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