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시험의 필요성

믿는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가지 부류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한사코 커지려는 사람들과 더욱 더 작아지려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편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그분을 따라 작아지려는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커지려는 사람들을 흠모하고 자신도 커지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커지려는 사람들 못지않게 작아지려는 사람들도 그 길을 가기가 어려운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한사코 그 길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또 작아지려고 결심하고 작아지는 길을 걸으려고 해도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걸을 수 없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험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진짜 작은 자로 만들어 주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우리는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시험에 드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유혹에 빠지는 것은 악에 빠지는 것이지만 시험을 만나는 것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부족함 없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영혼들에게 매우 엄격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에게 고난을 주는 것을 즐거워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분이 우리 영혼을 고난의 길로 떨어뜨리는 목적은 우리를 정화시키시기 위함이다. 정화를 위한 하나님의 수술 작업이 혹독한 이유는 우리에게 있는 질병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모든 면에서 온전하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칼을 들이대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죽어야 할 것과 나쁜 종양들만을 제거하신다. 결국 우리 고통의 원인은 타락한 자기 사랑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처가 얼마나 깊고, 강한 독성을 지니고 있는지 스스로 판단해 보라. 하나님은 많은 부분을 살리시지만 그만큼 혹독하게 고난을 당하도록 하신다." (프랑소와 페넬롱, 「그리스도인의 완전」)

페넬롱의 말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고난이 필요합니다. 시험이라는 하나님의 연단이 필수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처럼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 온전히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기 사랑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정화이고 영적 성숙입니다.

세 단계의 인생

인생은 수동으로 시작하여 수동으로 막을 내립니다. 태어나는 것도 수동이요, 죽는 것도 수동입니다. 처음과 끝이 수동인 인간은 사는 동안 수동을 망각합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동안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힘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것이 첫 번째 인생인 힘에 의존하는 인생입니다. 그러다가 힘의 한계와 좌절을 경험하면서 이 힘에 대항하는 두 번째 인생이 펼쳐집니다. 두 번째 과정을 극복하면서 세 번째 인생이 펼쳐지는데 세 번째 인생은 첫 번째 인생이 펼쳐지기 이전의 모습인 수동의 삶입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로 태어나 어른으로 살다가 다시 어린아이가 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동의 상태로 태어나 어른이 되면서 인간은 힘을 추구하는 존재가 됩니다. 인간의 불행은 거기서 시작합니다. 수동을 버리고 능동을 택하는 순간 인간은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페넬롱이 말하는 자기 사랑입니다. 영적인 삶이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능력을 행하는 삶이 아니라 수동을 배우는 삶입니다. 신앙인이란 수동의 삶을 배우는 존재들입니다.

첫 번째 인생에서 시작해 반드시 세 번째 인생으로 끝맺음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인생은 힘에 의존한 첫 번째 인생에서 끝맺을 수 있고, 힘에 좌절한 두 번째 인생에서 끝날 수 있고, 힘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 번째 인생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인생을 종식시키는 사건이 바로 시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험이 반복되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부딪혀야 할 세상의 유혹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부르심 받은 존재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자신을 맡기게 됩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수동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아들여 세 번째 인생을 사는 사람은 스스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자신을 맡깁니다. 인생은 맡기는 데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길에 들어선 대부분의 사람들도 수동의 삶을 배우지 못하고, 그것을 소극적이고 생산적이지 못한 삶으로 여깁니다. 그만큼 수동의 삶을 배우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습니다.

작은 아들의 삶을 통해 본 세 단계의 삶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의 삶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작은 아들의 삶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 아버지를 떠나 먼 고장에서 살던 때 (2)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 한 때 (3) 아버지께 돌아온 때입니다.

(1) 아버지를 떠나 먼 고장에서 살던 때

집을 떠나기 전 아들은 힘에 의존했습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젊음을 과신하여 재산을 나눠 받기만 하면 아버지보다 많은 재산을 모으고 잘 살 수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내 유산을 주십시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원하는 대로 재산을 나눠 줍니다.

재산을 챙긴 작은 아들은 제 힘만 믿고 집을 나섭니다. 아버지를 잊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우쭐대며 다 써버립니다. 작은 아들의 삶에 나타난 문제점은 방탕한 삶에 있다기보다 자기 능력에 대한 잘못된 믿음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머리, 능력, 재물이 자신을 지켜 주리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힘에 의존한 그의 삶은 결국 그 힘으로 인해 벽에 부딪칩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들려 주신 동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들려 주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남들을 평가하기 좋아하여 “저 사람은 죄인이다. 저 사람은 세리다. 저 사람은 창녀다.”라며 업신여기며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힘의 논리는 능력을 많이 가진 사람이 능력을 조금 가진 사람을 비판하고 업신여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마다 자기 능력을 과신하며 힘겨루기를 하다 보니, 남을 무시하고 폭력을 행사하게 되어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2)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려 한 때

작은 아들은 힘의 한계에 부딪히고 맙니다. 자기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자존심을 꺾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최후의 순간까지 자존심을 꺾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자존심을 꺾는 것이야말로 힘의 한계를 꺾는 것입니다. 돼지 먹이 앞에서 작은아들은 그 높았던 자존심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께 돌아가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해야지.'

자기 힘의 한계를 느끼고 나서야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가지고 나온 재산을 두 배, 세 배 늘였다면 아버지께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돌아갈 마음이 있었으면 처음부터 아버지 집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작은 아들은 힘의 한계를 느끼면서 자기의 보잘것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자신의 처량한 처지를 생각하면서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두 번째 인생을 마감하고 세 번째 인생으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그에게 닥친 시련이 시험의 기회였던 셈입니다.

작은 아들은 자존심 강한 존재임과 동시에 힘의 한계를 느낄 줄 아는 존재입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가까이 하시는 까닭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것은 죄인들 역시 작은 아들과 마찬가지로 힘의 한계를 느끼고 세 번째 인생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힘의 한계를 느끼는 것이야말로 회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자기 힘을 포기할 때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힘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처럼 사람들을 차별하고 사람들과 진정으로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비롭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옳게 판단하고, 옳게 사랑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께 돌아온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3) 아버지께 돌아와 살게 된 때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와 어떻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없습니다. 아무 말 없이 작은 아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습니다. 솔직히 그와 같은 아버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책임감 없고, 사랑 없는 아버지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태도에서 수동의 삶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무력한 수동의 삶이 어떻게 상황을 반전시키는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표현됩니다. 아버지는 한시도 잊지 않고 작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온 것은 아버지의 놓아줌의 영성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수동이 가지는 위대한 힘입니다. 수동은 힘으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힘은 현실을 바꿀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돌아온 작은 아들은 재산을 탕진한 결과 아버지를 진정으로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고 자신도 아버지처럼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작은 아들은 수동의 삶을 배웠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지적을 당한 것은 그들이 세 번째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아버지로 느끼지 못했던 큰아들처럼 아버지의 뜻을 살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준수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닮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별된 존재로 여기며 성역을 쌓았습니다. 자신들의 기준에 다다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업신여겼습니다.

소망의 사람이 되기까지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고 해서 평탄한 삶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은 어려운 시기를 견딤으로써 성품이 세워지는 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사도 바울은 환난을 즐거워한다고 말했지만 환난은 고통스럽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슬리피시스'는 상당한 정도의 스트레스와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담담하게 고통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고통이 없다면 인내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즐거운 일만 한다면 "끝까지 참으라"고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인내란 고통과 불편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는 오직 불편을 통해 인내하는 법을 배우고, 오직 인내를 통해 성품이 연단됩니다. 연단이라는 헬라어 '도키멘'은 '인증된 품격, 혹은 성품'을 의미합니다. 성품은 우리가 불을 통과할 때 형성됩니다. 성품이 시험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성품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소망을 갖고 고난 속에서 인내하는 법을 배울 때 진정한 기독교적 영성이 형성됩니다.

시험의 유익

"우리가 겪는 시련으로 인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과를 내고, 사람들과 분리되어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길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재앙을 면하기 위해 하나님께 소망을 아뢰기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치신 데 대해 더욱 큰 감사를 드릴 것이다. 하나님께 받은 다른 어떤 은혜도 이 불행에 비하면 별볼일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생 쥐르 라 콜롱비에르)

우리가 겪는 시련으로 인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과를 내고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면 과연 불행을 가장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될까요? 은혜보다 불행을 더 감사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될까요? .

고환암을 이겨내고 세계적인 자전거 경주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에서 세 차례나 우승한 랜스 암스트롱은 『문제는 자전거가 아니다』라는 책에서, 만약 자기가 투르 드 프랑스에서 승리하는 것과 암에 걸리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깨달은 바를 생각해 볼 때, 자신은 암을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순조로운 생활은 우리를 나약하게 합니다. 그러나 시련을 당할 때 우리의 눈은 자연히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하늘에 고정되고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시험을 통해 우리의 불순물들이 제거되어 진정한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을 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킨 사람의 행복은 지속적이고, 불변하며, 영원합니다. 어떤 두려움도 그의 행복을 흔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만 바라보기 때문에 눈앞에 펼쳐지는 시련과 고난들이 엄청날지라도 모든 것을 선의 도구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당당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시험은 필수입니다. 아무리 큰 시험이 닥쳐도 그것을 온전히 기뻐할 수 있음은 시험을 통해 우리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빚어지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들 때마다 우리의 연약한 몸과 마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유혹에 빠지지 말고 악에서 건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복하거나 통제해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힘으로 우리의 인생을 정복하려고 할 때 우리는 결코 주님이 바라시는 소망의 삶에 이르지 못합니다. 주어지는 삶의 정황을 시험의 기회로 받아들이고, 힘을 포기하고 자기 사랑을 제거할 때, 가장 소중한 것을 떠나 보낼 때, 수동의 삶의 완벽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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