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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II
최태선 목사  |  어지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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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25  04: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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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황제 숭배 사상

초대교회 공동체가 직면했던 가장 큰 문제는 국가였습니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충성하면서 로마에 충성할 수 있는지가 그들의 고민이었습니다. 네로 이후 열 번에 걸친 박해는 무려 250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교회사에는 그들의 박해 이야기가 빼곡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 황제의 명령으로 병사들은 갖가지 잔인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몸에 타르를 바르고 불을 붙여서, 산 채로 횃불이 되어 네로 정원의 밤을 환하게 밝혀야 했습니다.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들과 맞붙어 싸우면서 로마인들의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참혹한 일들이 벌어진 이유는 로마 제국의 황제 숭배 사상 때문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시민들은 누구나 "황제는 주인이시다."라는 구호를 외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황제는 주인이시다."라는 구호를 외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주인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86세의 폴리캅 역시 황제를 주로 고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명망 있는 지도자였고, 그의 선행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 그를 해치고 싶지 않았던 로마 재판관은 폴리캅에게 "가이사는 주님이시다. 무신론자들이여, 물러갈지어다."라고 한 번만 외쳐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황제에게 주님이시라는 고백을 드리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인들에게는 무신론자였던 것입니다.

폴리캅은 수많은 군중들이 지켜보고 있는 원형 경기장으로 불려나갔습니다. 관리와 그를 호송하던 로마의 병사들은 한 번만 외쳐달라고 손가락을 치켜들었습니다. "그대들이 원하는 바가 오직 그것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면서 폴리캅은 로마 관리들과 구경꾼들을 둘러보며 외쳤습니다. "무신론자들이여, 물러갈지어다. 지난 86년 동안 신실하게 섬겨온 주님은 언제나 내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그런 주님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국가라는 신

우리는 초대교회의 이런 이야기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에 담긴 국가에 관한 교훈을 읽지 못합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한 것은 당시 로마가 황제 신앙을 강요했기 때문이고, 지금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 있기 때문에 국가는 경계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북한과 같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거나 기독교를 용인하지 않는 국가들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질 뿐 민주주의 국가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권력은 본성상 늘 신성으로 옷 입으려 합니다. 그래서 과거 모든 국가들의 황제들은 자신들을 신이나 하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의 황제를 신이라고 하였고 중국의 황제를 천자라고 하였습니다. 현대의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의 주권, 권위, 그리고 권력은 신성으로 옷 입고 있습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그의 책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에서 "우리가 자녀까지 버리려 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정확합니다. 오늘날 자녀까지 바치려고 하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국가입니다. 근대의 정치 철학자들처럼 국가를 시민들의 자발적 합의와 계약의 산물로 보고 싶어 하지만, 오늘날의 국가는 국민으로 하여금 충성과 숭배를 요구하는 새로운 신이 되어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조국이라고 불리는 국가는 단순히 정치기구가 아니라 성스러운 숭배의 대상입니다.

현대인에게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신성한 영역이 바로 국가입니다. 현대인들이 유일하게 숭고한 감정을 느끼는 대상은 국가일 것입니다. 특히 19세기 이후 출현한 국민 국가는 인간의 의식 깊은 곳까지 사로잡았습니다. 이 시대에는 종교에 목숨을 건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이지만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은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받습니다.

오늘날 국가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선악의 기준이 됩니다.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아니라 국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인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을 인식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공의에 충실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국가가 나서기 전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게 됩니다.

오늘날 애국보다 더 숭고하고 위대한 행위는 없습니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범죄도 정당화됩니다. 국가가 신성불가침의 대상이요, 신앙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이 국가라는 사실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그것이 또 다른 우상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국가와 결탁한 교회

이런 말이 실감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국가를 위해 기도하고, 위정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과제라고 배워왔습니다. 물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나라가 하나님 나라보다 중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하나님 나라와 대척점에 서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역사 속의 모든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속한 나라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보다 더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고 약한 사람들이 보살핌을 받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국가가 잘 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잘 되는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깊이 박혀 있습니다.

초기의 교회는 국가와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에게 그리스도인들은 골칫거리였습니다. 10대에 걸쳐 잔인한 박해가 이어졌지만 기독교는 멸절되지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박해로 없어지지 않을 기독교라면 차라리 인정하여 제국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 하에 기독교를 공인 종교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공인은 기독교 자체에 심각한 변형을 일으켰습니다.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13번째 사도로 추앙했으며 로마 제국을 하나님 나라의 지상 모형으로 치켜세웠습니다. 체스터튼의 말대로 제국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었으나 기독교를 위해서는 나쁜 일이 되었습니다. 국가는 교회의 보호자를 자처했으며, 교회는 국가의 질서 속으로 신속하게 빨려 들어갔습니다. 국가가 하나님 나라의 질서 속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 나라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인식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교회는 로마의 행정 업무나 군 복무를 거부해왔는데, 314년 아를르 종교회의는 행정업무나 군복무를 거절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출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전쟁에 대한 이해도 달라졌습니다. 유세비우스와 같은 신학자에 의해 하나님 나라의 샬롬과 로마의 팍스 로마나가 동일시되었으며, 어거스틴은 '정당한 전쟁' 이론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392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국가와 교회의 혼합은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국가는 강제로 국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으며, 교회와 사제들에게 재물과 예배 처소와 사회적 특권을 부여하였습니다. 국가는 자연스럽게 교회를 쥐고 흔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고유의 영역이어야 할 신학마저도 제국에 도움 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배 방식이 달라졌으며 이방의 화려한 종교의식이 도입되었습니다.

중세 천 년간 황제와 교황 사이의 힘겨루기가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교황도 군대를 거느리고 세상의 방식대로 힘으로 통치하는 교회의 뿌리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교황 그레고리 7세와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카놋사의 굴욕 사건은 어떻게 교회가 세상의 권력에 동화되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 준 사건입니다.

그러한 현상은 종교개혁 때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독일 귀족과 손을 잡아야 했고, 캘빈은 제네바 시 정부와 손을 잡았습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 시 정부와 결탁하였습니다. 결국 종교개혁은 하나님 나라로의 전환에서 실패했습니다. 교회와 국가의 조화라는 기독교의 타락을 근절하지 못하고, 개혁을 이루기 위해 세상 권력에 의지하는 자가당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교회는 왕당파의 일원이었고, 나폴레옹 시대에는 제국주의자가 되었으며, 공화정 밑에서는 공화주의자였으며, 파시즘 하에서는 파시스트였으며 나치 치하에서는 나치당의 일원이었습니다. 교회는 늘 주류의 흐름에 편승했으며, 힘 있는 자의 편에 서서 자기 힘을 강화시키려 했습니다. 결국 사랑의 나라여야 할 교회는 힘의 나라가 되었고, 하나님 나라여야 할 교회는 세상 나라들과 다름이 없어졌습니다. 그러한 슬픈 기독교 역사는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 기독교를 향해 주기도문의 송영은 엄숙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세상 나라는 영원한 나라가 아닙니다.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말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빌 3:20). 우리는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요 17:14).

루벤스, 사자굴의 다니엘

영원한 나라

다니엘서 2장에는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풀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이 이상하여 바벨론의 지혜자들을 모아 해몽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은 꿈의 내용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를 먼저 맞히고 해몽을 해야 믿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왕이 꾼 꿈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할 처지가 되었는데, 다니엘이 꿈에 대해 말합니다.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부서뜨리매 그때에 쇠와 진흙의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단 2:31-35).

이어서 다니엘은 해몽하기 시작합니다. 느부갓네살이 대표하는 첫째 왕국을 뒤따라 나오는 둘째, 셋째 왕국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금과 은과 동이 상징하듯이 그 나라들은 느부갓네살의 제국보다 열등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미래의 나라인 넷째 나라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 나라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 직전의 세상 나라를 대표하는 나라임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는 '뜨인 돌' 혹은 '산 돌'에 의해 망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를 해석하는 많은 사람들 간에 네 나라가 어떤 나라를 가리키는지, 넷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네 나라를 세계사 속의 특정 나라와 결부시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징입니다. 이 나라들은 세계사에 출현한 모든 나라들의 대표이며,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기 직전의 세계 제국인 철과 흙의 나라가 하나님 나라에 의해 산산조각이 날 것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나라들,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는 나라들은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강한 나라일 뿐,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취약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했던 아시리아. 바벨론, 바사 제국은 물론, 그리스, 로마, 스페인, 대영제국,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세계를 재패한 강대국들은 쇠와 진흙의 결합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쇠와 진흙이 혼합된 나라는 '산 돌'에 의해 파괴되어, 네 개의 세계 제국을 대표하는 금 신상 자체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네 개의 거대한 세계 대제국이 하나의 거대한 신상을 구성했다는 점입니다. 국가가 우상이 된 모습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들은 언제 어디서 출현하든 거대한 신상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주기도의 송영이 밝히고 있는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나아만

불치병인 문둥병에 걸린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병이 나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살아 계신 참된 신이라는 사실과 함께 아람의 림몬은 참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아람으로 돌아가 왕을 보좌해야 하는 그는 왕이 림몬 신에게 절할 때 어쩔 수 없이 림몬 신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그는 그러한 사실을 엘리사에게 말하면서 림몬 신에게 분향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해 주실 것을 부탁했습니다. 미리 사죄를 드린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나아만에 대해 엘리사는 "평안히 가라"(왕하 5:19)고 말함으로써 그의 입장을 지지해 줍니다.

나아만은 미리 용서를 구하고 여호와만 경배하기로 다짐했습니다. 나아만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의 중심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면서 국가에도 충성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적 긴장의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의 삶의 태도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

나아만보다 조금 더 적극적인 예가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경우입니다.

바벨론과 같은 고대 제국들은 다문화적이고 다인종적인 복합국가였기 때문에 피정복민 출신 엘리트를 양성하여 피정복민 통치에 활용했습니다. 바벨론 제국은 유다에게도 같은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엘리트 유대인 청년들을 3년 간 교육하여 바벨론의 관원으로 활용하였습니다. 교육 기간 동안 왕은 청년들에게 자신이 지정한 음식과 포도주를 공급하였습니다. 특별대우를 하면서 고급 관리를 양성한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엘리트 유대인 청년들이었습니다.

바벨론의 환관장 아스부나스는 가장 먼저 그들의 이름을 바벨론 식으로 고쳤습니다. 다니엘은 벨드사살, 하나냐는 사드락, 미사엘은 메삭, 그리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고 개명하였습니다(7).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표현하는 이름 대신에 바벨론 신을 섬길 의지를 드러내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미사엘은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 하나냐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아사랴는 ‘하나님이 도우셨다'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메삭은 바벨론 땅의 여신 이름이고, 아벳느고는 바벨론의 신인 느고의 종이라는 뜻이며, 사드락은 바벨론의 신 아쿠의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재판하신다‘는 의미의 다니엘은 ’벨(바벨론의 신)이여, 왕을 보호하소서‘라는 의미의 벨드사살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상징하는 바가 그들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바벨론 신의 종이 될 것인가? 그들은 운명의 기로에 서게 된 것입니다. 거대한 세속사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부정 당할 위기에 처한 다니엘과 세 친구는 결연하게 대처합니다.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는 굳센 결심을 한 것입니다(8). 생명을 걸고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제국에 빌붙어 살기를 정면으로 거절한 것입니다.

곤란해진 사람은 그들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환관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든 그들을 회유하여 바벨론을 위해 일하도록 만들 책임이 있었습니다. 또 거기에 그의 목숨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 환관에게 세 청년은 타협안을 내놓았습니다. 왕의 진미를 거절하고 채식만 하는 대신 자신들의 얼굴이 꺼칠해지면 다시 왕의 진미를 먹기로 한 것입니다. .

그들이 처음 선택한 것은 단순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것에 충성한 그들의 믿음은 큰 위기 앞에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죽게 되는 상황 속에서도 기꺼이 바른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한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6-18).

다니엘 역시 세 친구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공개적으로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자신의 방식대로 살라고 명령합니다. 국가는 신이 되어 헌신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따를 수 있는 명령이 있고 헌신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빈면 따를 수 없는 명령이 있고, 헌신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세상 나라인가? 하나님 나라인가?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국가의 권위에 순복해야 합니다(롬 13:1).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고 세금을 내는 등 국가의 업무에 최대한 협조해야 합니다. 그런 부분이 우리가 세상 나라를 향해 헌신할 수 있는 부분들입니다. 하지만 국가가 자신의 권위에 신성을 덧입히려 할 때, 국가의 활동과 기능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국가가 서지 못할 곳에 선 가증한 물건(막 13:14)이 되어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늘 아래 그리고 땅 위에 오직 영원한 나라는 하나님 나라밖에 없음을 믿는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는 그러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우주에 신은 오직 여호와 한 분뿐이시고 나머지는 피조물입니다. 어떤 피조물에도 신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왕은 오직 한 분뿐이시며 오직 그분의 나라만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기도의 송영에 담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와 그리스도 사이에서 누가 왕이신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 송영은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선택이며 동시에 그 선택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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