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예수 비유 묵상” 여덟 번째 시간은 예수님의 비유를 묵상하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의 비유는 흔히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5-37)로 알려진 유명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와 논쟁하는 자리에서 강도 만난 한 사람을 도와주었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 주십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뒤흔들어 깨우려고 하셨던 모습은 “공허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과 논쟁을 하고 있던 율법교사는 율법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율법의 핵심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요약하는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눅 10:27)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율법을 깊이 연구했고, 오랜 신앙의 연륜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질문만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29절) 이 사람은 율법의 핵심 중 하나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이웃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헛똑똑이"라고 부릅니다. 무언가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진짜 중요한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율법교사는 공허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믿음이 머리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신앙과 삶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진짜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많은 지식 때문에 삶에 대해 질문을 많이 하지만, 언제나 질문만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삶에 대해서 질문만 하고 있는 사람은 삶이 공허해집니다. 삶에 실체가 없고 질문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질문하는 이 율법교사에게 공허한 믿음을 넘어서 진정한 신앙과 삶으로 나아가기를 초대하십니다. 이 사람이 진짜 믿음과 진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사랑해야 살아간다

첫째는 사랑입니다. 질문만 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가 될 때에 진짜 믿음과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비유에서 율법교사처럼 질문만 하는 두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이들은 길 위에 쓰러진 사람을 피해서 길을 갑니다. 케네스 베일리는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라는 책에서 이들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 주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추측해 봅니다. 이들은 강도 만난 사람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죽은 자를 만지면 부정해지기에 자신이 맡은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피해 갔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이 두 사람은 한 마디로 생각이 많았던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면서 율법의 해석을 생각했고, 남의 시선을 생각했습니다. 머리에 있던 지식으로 삶을 향해 질문만 쏟아내었습니다. 얼마나 공허한 모습입니까? 사람이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데, 무엇이 옳고 그른가 머리 속에서 질문만 쏟아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모습입니까?

하지만 세 번째 등장한 사람은 달랐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달려가서 상처를 싸매고, 자기의 짐승에 태워 가까운 숙소로 데려가 모든 비용까지 미리 지불하는 선을 베풉니다. 사마리아인이 선을 베풀 수 있었던 이유를 본문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33절).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깁니다. 이것이 그를 도와 주었던 이유의 전부입니다. 강도 만난 자를 향한 긍휼, 길에 쓰러진 낯선 사람을 향한 사랑이 사마리아인으로 하여금 선을 베푸는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성서학자 프란츠 린하르트는 본문의 메시지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 사람이 나의 이웃이 될 수 있는지 질문하는 것을 넘어서 내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줄 수 있는 방법은 사랑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것이 가슴으로 내려올 수 있는 방법, 실체가 없는 공허한 삶에 알맹이를 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린하르트의 말을 이렇게 바꾸어볼 수 있습니다. “이웃에 대해 질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삶에 대해 질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이 공허한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이 왜 이럴까?’ 공허한 이유도, 삶에 대해서 질문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왜 이리 허전할까?’ 느껴지는 이유도, 신앙에 대해 질문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의 머리에만 있는 것을 가슴으로 내려오게 하고, 실체가 없는 공허한 질문에 대답을 얻게 만듭니다. 신앙과 삶에 대한 질문을 넘어서 사랑하는 자가 얻는 풍요로움을 누려야 합니다.

 

실천해야 살아난다

둘째, 오늘의 비유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진짜 믿음과 진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실천입니다. 질문하는 자가 아니라, 예스로 응답하는 자에게 진정한 삶이 펼쳐집니다. 우리의 문제는 질문만 하는 것입니다. 질문만 던지는 사람은 고단수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아는 것에만 그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을 단 한 가지라도 실천하며 살았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절). 예수님의 결론은 단순합니다. “실천해야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김기석 목사님이 쓴 『아슬아슬한 희망』이라는 책에서 한 농부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어느 도시의 옷가게 앞에서 열정적인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 앞으로 허름한 옷차림의 농부 한 명이 지나갔습니다. 전도자 중 한 사람이 그를 향해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당신은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느닷없는 질문에 이 농부는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농부는 쭈뼛거리다가 전도자에게 펜이 있느냐고 물어보더니, 종이에다 십여 명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내려갔습니다. 대개는 그를 잘 아는 친구들이었지만, 그와 사이가 좋지 않은 이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리스트를 다 쓰고는 농부가 전도자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구원받았는지 이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농담인 듯하지만 농담이 아닌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소개해 주고는 김기석 목사님이 이렇게 덧붙입니다. “존재의 변화와 무관한 구원 체험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존재의 변화를 먼저 알아차리는 이들은 가까운 사람들이다. 신앙생활이란 고백과 삶 사이의 거리를 좁혀가는 과정이다.”

이 이야기는 깊이 묵상해 볼 만한 이야기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삶이 변화됩니다. 우리 주변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과연 내가 변화되었다는 것을 증언해 줄까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과연 나의 신앙생활이 입술의 고백과 삶 사이의 거리를 좁혀가는 과정이 되고 있다고 수긍할까요?

우리의 과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삶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내가 살아나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나의 신앙생활이 공허한 이유는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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