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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를 몰아내다
윤효순  |  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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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1.08  00:4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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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꽁지가 긴 새는 뭔가를 단단히 결심한 듯했다. 뒷집의 지붕 끝에서 우리 감나무를 외면하고 앉아 있는 모습은 단호하고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몸짓을 한 이유를 난 금방 알아 낼 수 있었다. 우리 부부가 그 전날 두 시간을 들여서 감나무 여기저기에 흉하게도 굵고 하얀 실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가며 줄을 쳐두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삼십 년 넘게 들어온 소리가 있다. 이른 봄부터 겨울이 오기 전까지 아침마다, 침대 옆 창을 통해 멀리서 작게 속삭이듯 들려오는 새 소리는 보드랍고 달콤했다. 맑고 가는 멜로디지만 나른한 잠에서 아직 다 빠져나오지 못하는 나에게 가뿐하게 일어날 수 있는 기운을 선사했다. 자명종 소리가 아닌 새 소리에 일어나는 기쁨, 하루를 시작하는 활력소임에 틀림없었다.

오래된 집에서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생각지도 못한 문제들이 자주 찾아온다. 그러나 우거진 나무 그늘이라든가, 새들의 조용한 음악회는 놓치고 싶지 않은 큰 즐거움이었다.

그랬던 아침의 작은 새 소리들이 웬일인지 올 봄부터 그 분위기를 확 바꾸어 버렸다. 음악 무대가 아니라 흥미롭고 열광적인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서곡인양 광란의 무대 그 자체였다.

깍 깍 깍 깍 삐룩 삐룩 꾸우 꾸우...... 감나무 위에서 펼쳐지는 음악회는 머리맡 창문을 통해 귓가에 당도했다. 흥미롭고 열광적인 하루 속으로 들어가는데 지각이나 하지 않을까 벌떡 일어나게 만들곤 했다. 뒤뜰에서 들어오는 소란스러움은 날마다 똑같은 내 삶에 큰 행운이 준비된 것 아닐까 하는 기대까지 하게 했다.

주말 아침엔 커피 한 잔을 들고 음악회를 방해하면 어쩌나 염려하며 까치발을 하고는 조심조심 걸어 작은 의자에 앉아서 그들 연주회의 청중이 되기도 했다. 나의 행동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저희들끼리 화답하는 소리를 즐기다가, 그들 무리에 끼어 ‘꾸꾸꾸’ 흉내를 내기도 했다. 작은 뒤란의 의자는 주말 아침에 새 소리를 감상하는 자리가 되어 버렸다. 깊은 숲속을 찾아가지 않아도 충분했다. 새는 나로 노래하고, 나는 새로 노래하는 즐거움을 갖는 나의 주말. 난 참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감도 영글어갔다. 어느 구월의 주말 아침, 늘 앉곤 하던 의자를 지나 제법 붉어지는 감나무 밑으로 간 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새들로부터 쪼임을 당해 떨어져 뒹굴고 있는 많은 감들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새들이 거저 들르는 줄 알고 음악회를 즐겼는데, 이 많은 감들이 대가로 치러졌음을 알고 분개했다.

녀석들이 하나를 쪼아 알뜰하게 다 먹었으면 화가 좀 덜 났을 것이다. 절반도 안 되게 파인 감은 그래도 많이 먹은 편이었다. 한 번의 부리 자국이 낸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아직 맛이 덜 든 감들이 떨어져 있질 않은가. 괘씸한 새들의 소행인 줄도 모르고 그것을 즐기고 있었던 철없는 내가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삼십 년의 감 수확 동안 이렇게 많은 피해를 본 적이 없었다. 참 이상했다. 해마다 새가 감을 쪼는 일은 없었는데, 올해는 이상하게 많은 새들이 우리 뒤뜰에 몰려와 하지 않던 일들을 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새들을 쫓기 시작했다. 종일 감나무 밑에서 호령할 수도 없고 내 힘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궁리 끝에 인터넷을 뒤졌다.

드디어 찾았다. 새 쫓기! 남편을 졸랐다. 굵은 흰색 실을 사왔다. 한 쪽은 사다리. 다른 쪽은 지붕을 의지하여 남편과 난 열심히 줄을 던지고, 당기고, 묶는 작업을 했다. 이리저리 어수선한 하얀 직선을 편 채 서있는 감나무가 낯설어 보였고, 야멸차고 인정머리 없는 내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서 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긴 꽁지를 빼고 감나무를 뒤로 하고 앉아 비장해 하는 새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렇게 새들의 무대를 빼앗은 것이다.

자연스럽지 못한 흰 줄 밑에서 감은 하루가 다르게 붉게 익어갔다. 새들은 다시 오지 않았다. 아침의 그 활기찬 음악회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큰 지저귐에 익숙해진 내 귀는 이제 멀리서 작게 지저귀는 새소리까지도 듣지 못하나 보았다. 점점 새들의 음악회가 그리워졌다. 양심이 없는 바람이었다.

석양이나 이른 아침, 동네를 걷다가 우리 감을 쪼던 꽁지 긴 새가 높은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곤 했다. 나를 외면한 자세가 분명했다. 나도 그들 쪽으로 얼굴을 돌려 웃어줄 수 없었다. 새들이 공짜를 즐기려는 양심 없는 내 속을 벌써 알아버렸을 것 같아서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박정한 사람이 멀리서 아스라이 들리던 새 소리까지 즐기지 못하게 됨은 당연한 대가였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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