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권세

복음은 해방의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권세들로부터 해방시키실 뿐 아니라 권세들 자체도 해방시키십니다. 오늘날 권세는 폭력에 의해 질서를 유지하는 지배체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윗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있습니다. 권세를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권세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가장 위에 올라가 권세를 차지한 자도 결국은 권세라는 지배체제의 한 부분이 되어 권세의 지배를 받게 마련입니다.

권세의 정의와 기원에 관한 신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합니다. 그것을 여기서 다 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글에서는 예수님의 시험 기사에 등장하는, 사단에게 절하면 얻을 수 있었던 천하만국과 그 영광이 말하는 세상의 통치권을 권세로 생각하겠습니다. 권세란 힘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지배체제 혹은 구조를 말하며,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세상의 통치 방식을 총칭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 방식과 대척점에 있습니다.

하지만 권세들이 악한 영들의 세력 하에 있다고 해서 악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무정부 상태의 혼돈에 대항하는 보루이기도 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그런 이기적인 존재들 간의 타협이란 평행선을 달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연 상태의 인간은 토마스 홉스가 말하는 대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입니다. 그대로 두면 인간이란 영원한 투쟁의 대상으로 타협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인간들에게 질서를 부여해 주고 타협점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권세입니다.

뿐만 아니라 권세는 상호 의존, 상호 돌봄, 사회적 응집을 격려하는 가치를 불어넣기도 합니다. 권세란 근본적으로 자기 보존에 충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권세는 사회적으로 유익이 되는 선을 장려합니다. 상호의존이나 상호 돌봄은 사회적 응집력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덕목입니다. 그래서 권세는 사회적 덕목을 장려하는 것입니다. 또한 권세들은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 선을 위하여 개인적인 욕망을 양보하도록 격려합니다.

권세들이 사악한 것은 인간이 그것들을 우상 숭배한 결과입니다. 인간의 타락이 있기 전에 영들의 타락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떤 것이며 어떤 상태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성경은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경로로든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권세의 타락과 연결되었고, 권세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 것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선과 악을 가리려 하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마음이 세상과 관련된 권세 역시 타락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세들 또한 인간의 구원과 함께 구원받을 것입니다. 구원 받은 인간은 더 이상 이기적인 존재로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이 구원 받으면 권세 또한 창조 당시의 모습으로 회복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권세의 구원이 될 것입니다.

복음은 개인을 구원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변형된 세계를 향한 메시지입니다. 구원이란 권세들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죄와 권세들의 공범 관계를 용서 받는 것이며, 권세들이 우상화되지 않도록 해방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엡1:10) 하셔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일 즉 우주적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 이해가 이와 같이 달라질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개인 구원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과 사회 모두의 변혁입니다. 따라서 복음화와 사회 정의 운동은 하나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바로 그 일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권세에 대한 십자가의 승리

세상의 지배체제를 이루고 있는 권세는 악한 영의 세력 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련된 부분에 관해 민감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세상의 통치방식인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신 이후에는 더더욱 민감해졌습니다. 그래서 권세는 모든 힘을 다하여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억누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결과를 분명하게 예상하고 계셨습니다.

악의 권세들은 너무도 강력하여 그것에 반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거나 무모해 보입니다. 근본적 변화를 위한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권세들은 단지 이기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압도적으로 이겨서 반대세력이 반역을 시도할 수 없게 만듭니다. 권세는 폭력을 사용하여 반역의 씨앗을 제거합니다. 세상에 군림하는 권세들에 대항하거나 도전했던 사람들 역시 예수님처럼 죽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바로 그와 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뭔가 잘못 시행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채찍으로 매질하였는데, 채찍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그들의 불법성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왕을 상징하는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씌워서 조롱했고, 침을 뱉어 멸시했으며,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때리면서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웃음거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시 돋친 조롱은 수십 세기 동안 메아리쳐 울렸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벌거벗기고,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아 처형하였는데, 그것이 자신들이 누리던 구속적 폭력의 은밀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결정적 패착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것은 종교 그 자체였습니다. 율법이 그분을 매달았습니다. 질서를 받드는 사람들이 그분을 죽였습니다. 그분을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들은 야만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당대 최고라고 여겨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분은 무죄였을 뿐 아니라 참된 종교, 참된 율법, 참된 질서 그 자체였기에 그분의 희생은 그들의 폭력을 만천하에 드러나도록 하였습니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1:13-15).

십자가의 승리는 정사와 권세를 환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권세의 원천은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권세가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은 은밀하게 역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그 은밀함을 만천하에 드러냈습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권세는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구속적 폭력이라는 신화가 더 이상 자리 잡을 터전이 없어졌습니다. 정사와 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는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권세들과 공범임을 폭로했습니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유를 처분하려는 인간의 마음을 폭로하였습니다. 권세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은 인간의 타락한 마음 때문입니다. 권세의 실체가 드러나자 인간의 실체 또한 밝혀진 것입니다. 권세는 더 이상 절대적인 권한을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권세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절대적 권세가 통치하는 세상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예수님을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권세에 대한 십자가 승리가 중요한 것은 이제까지 기독교가 폭력의 가면을 벗기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여전히 '정당한 전쟁'이라는 권세의 방식을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공인해 왔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권세의 수하에 머물게 하였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아직도 교회들은 구속적 폭력이라는 신화를 믿는 권세의 일부분인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가 타락한 권세가 된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힘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내주를 힘입어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나라와 권세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을 송영으로 드리는 하나님 백성들의 과제입니다.

하나님의 내주하심과 교회의 약함

교회의 소명은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이 머무시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약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질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머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약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어려운 것은 약함의 신학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며, 약해지는 과정의 불안함을 믿음으로 견뎌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비롯하며 모든 성경 기자들이 강조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약함과 하나님의 내주하심입니다. 교회가 약해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 4:7-12).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이보다 더 잘 묘사해 주는 본문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 어디에도 그리스도인이 강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연약할 뿐입니다. 우겨쌈을 당합니다. 답답한 일을 당합니다. 박해를 받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그런데도 죽지 않고 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우리의 약함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거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약해졌을 때에야 하나님을 의존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가 교회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눅 10:3).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핏 들으면 무모해 보이는 이 말씀에도 약함의 신학이 들어 있습니다. 자크 엘룰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인과 같은 대접을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의 사역의 한 몫을 나누어 받는다. 그는 양이다. 이것은 그의 행위나 희생이 세상을 깨끗케 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어린양의 희생을 가리키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의 한가운데서 살아 있는 진짜 표지이다.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리'가 되기를 원하며 아무도 '양'의 역할을 하라고 요구받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은 이 살아 있는 희생의 증인 없이는 살아 있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의미의 '이리들'(즉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만 하는 본질적인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날마다 자신의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한다. 이러한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와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으로 그 의미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희생 제사가 되신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인류와 모든 피조물을 위한 희생의 제사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약해지신 그분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대속의 교리로만 보려 하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에 담겨 있는 약함의 신학을 간과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야말로 모든 것을 선의 도구로 만드시는 완벽한 권세, 참된 권세 그리고 유일한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선 악의 최후 수단인 죽음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세상 권세가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거기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모든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해결됩니다. 그분의 능력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늘에서 악한 영들의 타락이 있었고, 땅에서 인간의 타락이 있었고, 거기에 따라 온 피조세계가 타락하였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을 가능케 하셨던 하나님의 능력 외에는 회복의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약함, 교회의 약함에서 나타납니다.

"우리의 힘을 해체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은혜의 뿌리다. 우리 안에서 아주 작은 힘이라도 일어난다면 그만큼 성령님과 하나님의 권위는 뒤로 물러설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직 한 가지 가장 중요한 통찰이다." (브루더 공동체, 에버하르트 아놀드)

"거만한 사람은 항상 옳은 일, 위대한 일을 하기 원한다. 그러나 그 일을 자기 힘으로 하길 원하기 때문에 그는 사람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싸우고 있다." (쇠렌 키르케고르)

사도 바울 역시 같은 말을 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하는 오직 한 가지는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교회의 약함 가운데 내주하시는 하나님, 그분의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던 큰 교회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세상의 지탄을 받는 타락의 길을 걷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약함을 타고 흐르는 하나님의 능력,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받아들여할 진리는 바로 이 약함의 신학입니다. 이제부터는 약한 것들을 자랑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미래는 온전히 주님의 것입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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