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 이제 무엇에서 어떻게로!

더 이상 우리가 구약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요나가 아니고, 신약의 베드로나 바울이 아니고, 마지막으로 계시록의 요한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기가 어렵다. 혹 받았다 하더라도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분별이 쉽지 않다. 모세가 경험했던 개인적인 떨기나무의 기적이나, 기드온이 억지 부려 얻어낸 양털뭉치의 기적이나, 그것도 아니라면 거국적인 구름기둥이나 불기둥과 같은 외적인 사인을 통해 우리의 복잡다단한 21세기 세상사를 분별하는 것은 솔직히 무모에 가깝다. 우리는 현재, 우리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이래라 저래라”하는, 마치 건설현장의 작업반장이 하루 일과를 지시하듯, 곧이곧대로 지시를 받을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교회이건 가정이건 사회이건 늘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누구나 어떤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다면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싶어한다. 이유 불문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갈구한다. 그리고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바로 그 문제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해명을 듣고 싶어한다. 특히 이때는 구약의 어린 사무엘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 “말씀하시옵소서. 제가 듣나이다!” 그래서 잠 자기 전에 기도한다. “주여, 꿈에서라도 나타나 주소서!” 그래서 찬양한다. “주여 지난 밤 내 꿈에 뵈었으니 그 꿈 이루어 주옵소서 밤과 아침에 계시로 보여주사 항상 은혜를 주옵소서.” 여전히 복잡하고 머리가 핑핑 도는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직접’이라는 단어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보고 ‘직접’ 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잊을 만하면 서점 가판에 깔리는 ‘천국에 다녀온 아이와  어른들의 경험담’들을 읽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이런 책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위로가 되고 희망이 생기고 선명해지는 게 아니라, 되려 머리와 심정이 복잡해진다는 것이다. “맞는 거야, 틀리는 거야?” “이게 나하고 상관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어, 천국이 정말 최고급 빌라와 같은 거야?” 문제는 이런‘은혜’로 충만한 체험자이자 저자들에게 찾아온 그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과 우리가 알거나 경험한 하나님의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나 역시 지금까지 책을 여러 권 썼지만, 그럴 때마다 팔십 넘은 어머니가 아들 책 대박 나라고 새벽기도회도 마다하지 않으셨지만, 소위 대박 한 번 터지지 않았으며,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나같이 평범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찾아오시길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물론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미국 최고의 신학자이자, 정신질환자인 아내와 같이 살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지켜낸 스탠리 하우어워스에게도 하나님은 특별히 찾아와 주시기 않았다. 그러니 우리들의 분별 수준은 늘 미로 속을 헤매고 다니는 정도,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말대로 하면, ‘정답 없는 삶’ 정도이다.

그렇다면 현재 나의 위치는?

 

밴쿠버 어느 동네 도서관에 움츠리고 앉아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두 손가락으로 컴퓨터 자판을 쳐대고 있는 이 시각, 나의 아내는 15개월여 암 투병을 하고 있다. 선교사로 파송되기 전 아내의 갑작스런 암 진단으로 모든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조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욥의 하나님과 같이 “주기도 하고 가져가시기도 하니” 하나님의 마음이 변하시기 전에 헌신하자고 굳게 마음 먹었건만, 모든 것을 다 내려놓자고 했건만, 하나님은 이런 나의 헌신을 받지 않으셨다. 대신 고통을 주셨다. 그것도 직접적인 고통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있는 대상을 골라서.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암이라는 병을 통해서.

여하튼 투병 과정은 하루하루가 분별의 순간이었다. 수술해? 내장을 다 잘라내? 인공항문을 달아야 한대! 이래야만 하나? 자연적으로 나을 수 있는 방법은? 전이가 걱정되는데?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러다가 죽는다면? 오늘은 몸이 안 좋네, 내일은 몸이 또 좋네, 피가 나오네, 머리가 어지럽네, 식욕이 없어지네! 의사와 병원은 믿어도 되는 것인가? 저들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이런 제안을 하는가? 저 의사는? 아니면 이 의사는? 이 방법은? 아니면 저 방법은?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했을 모든 신앙/종교적인 행위는 다 시도했을 거다.

“고난을 기쁨으로 여기자, 고난이 축복이다, 슬퍼하지 말고 되려 예배하고 찬송하자, 기도하자, 정결하자, 사랑의 파이를 늘려 더욱 봉사하자...”

무엇보다 ‘왜’ 우리가 이런 일을 경험해야 하는지 따졌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다. 밤마다 꿈에 나타나 달라고 빌었다. “말씀하소서, 당신의 뜻을 알게 하소서! 죽으라면 죽겠으니 제발 당신의 뜻이라도 알게 하소서!” 아내와 나는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고, 하나님의 목소리는커녕 그림자도 뵙지 못했다. 물론 가끔 환상들을 보기는 했지만 근거가 희박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 옛날 뜻 모를 고난 중에 욥이 만난 하나님은 아직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으셨고, 우리를 권면할(혹은 대항할) 친구들조차 보내지 않으셨다. 아, 우리는 친구 복이 없는 건가? 욥의 하나님은 결국 38장에 나타나셨고, 욥의 항복을 완전하게 받아내셨지만, 우리의 욥기는 지금 몇 장이며 우리의 하나님은 지금 몇 장에 잠복해 계시는지 미궁이다. 우리는 여전히 재를 뒤집어쓰고 있어야 하는가? 우리도 하루빨리 욥기 42장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끝을 보고 싶다). 그래서 욥이 말한 것과 같이,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 42:2)라고,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고 고백하고 싶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덤으로 받아내고 싶다. 욥에게 하신 것처럼, 죽은 자식들을 대신해 다시 자식들을 주시는 정도의 축복까지는 원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옆에서 앓고 있는 아내만 살려내라는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묵묵무답이시고 세상은 어둠 가운데 있다. 하루는 여전히 23시간 56분 4.091초의 주기로 정확히 자전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시계는 정지해 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성경이 위로가 된다? 맞다. 기도가 힘이 된다? 맞다. 친구의 방문이 위로가 된다? 맞다. 주일 목사님의 설교가 위로가 된다? 맞다. 이런 와중에도 난민을 위한 구제활동이 위로가 된다? 맞다.

하지만 이런 위로들이 우리의 당면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도리어 위로의 말들은 너무 고상하고 차원이 높아, 내일 아침 당장 우리의 배를 채울 빵 문제하고는 상관이 없었다. 위로는 그저 위로일 뿐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씀하지 않으셨고, 언젠가는 그러실 거라는 기대조차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믿고 있는가? 우리는 믿음이 부족한 자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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