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랑 한 장 남아 있는 그해 달력에 적힌 12월 넷째 주 일요일이 24일이었다. 주일과 크리스마스 이브가 겹친 그날 눈이 온종일 내렸다. 크리스마스 카드에서 종종 보는 멋진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너스로 받는다는 기쁨에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설레면서도 눈 쌓인 길을 운전할 일을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내가 섬기는 교회는 그날 주일 예배와 크리스마스 이브 축하 예배까지 다섯 번의 예배가 있었다. 어쩌면 눈이 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후 4시에 드리는 예배에 참석키로 하고 기다렸으나 계속 내리는 눈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겨울철이면 두어 번 눈 때문에 발이 묶일 때가 있는데, 오늘이 그 첫 번째인 것 같아 교회 가기를 포기하고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다가 문득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갈릴리 호수 한가운데서 광풍을 만나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위해 예수께서 친히 물 위를 걸어 그들이 탄 배를 향해 오고 계셨다. 예수님을 알아 본 베드로가 반가워서 예수님을 맞으려고 발을 물 위로 내디뎠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몇 걸음 걷던 베드로가 성난 바람을 보았을 때,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물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베드로를 예수께서 즉시 건져주시며 책망하셨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마 14:22-33) 베드로의 시선이 예수께 고정되어 있을 때 그는 물위를 걸을 수 있었지만 그의 시선이 성난 광풍을 본 순간 두려움에 쌓여 더 이상 물 위를 걸을 수 없었다는 말씀이다.

펑펑 내리는 눈을 보고 주님의 날에 주님 전에 가기를 주저하는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성령께서 깨우쳐 주셨다. 하나님 전을 사모해서 눈길도 마다않고 집을 나서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겠느냐고! 코트를 다시 입고 눈길을 운전해서 교회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예배가 시작된 후라 좌우 살필 겨를도 없이 급히 예배실로 뛰어 들어갔다.

눈길에 운전대를 손수 잡아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도일(Doyle) 목사님이 전하시는 성탄 메시지에 이어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른 후 예배가 끝난 줄 알았는데, 뜻밖에 성탄을 축하하는 촛불 예배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성도들의 손에 초가 들려 있는데 내 손에만 초가 없었다. 순간 당혹감이 몰려오면서 부끄럽기까지 했다. 오른쪽에서 예배드리던 부인에게 물어보니 문 앞에 가면 초가 있다는 거였다.

 

문 앞에 가서 초를 가지고 와야 하나, 아니면 촛불 없이 예배를 마쳐야 하나 망설이는 동안 앞줄부터 시작된 촛불 릴레이가 벌써 내가 앉아 있는 자리까지 왔다. 내 왼쪽에서 가족과 함께 예배드리던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초에 불을 붙였다. 불이 환하게 타오르는 초를 든 소년이 천천히 나를 향해 몸을 돌이켰다. 그리고 나를 올려다보면서, "여기, 이 초를 가지세요." 라고 말했다. 아! 빈손으로 서있는 조그만 동양 할머니를 소년이 생각하고 있었구나! 소년의 친절에 감격한 나는 미처 감사하다는 말도 못한 채 얼결에 소년의 손에서 초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초를 하나 더 가져올 수 있느냐고 부탁했다. 착한 소년은 고개를 한 번 주억거리더니 단숨에 문 앞까지 달려가서 초를 가지고 왔다.

그 초에 불을 붙이는 소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You are AWESOME! Thank you SO much!" 빈손으로 서있던 나의 부끄러운 순간을 커버해 준 소년의 친절을 고마워하는 내게 "You are welcome!" 하고 답례하는 그 소년에게서 이 나라의 장래에 밝은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언뜻 했다. 서로 친절하고 사랑하라고 당부하신 성경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고 삶 속에 실천하는 아이들이 십 년, 이십 년 후 이 나라를 이끌어 갈 그때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장중에 붙드시고 동행하시며 도와주실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었다.

성도들의 손에 들린 수천 개의 촛불이 온 성전을 밝히는 가운데, 나도 소년 곁에서 촛불을 높이 들고 인류를 죄에서 구원키 위해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했다. 모든 순서가 끝난 후 소년의 손을 꼭 잡고 몇 학년인가 물어보았다. 육학년이라고 대답하는 그에게 나는 주일학교 일학년 교사라고 일러 주었더니 알고 있었다는 듯 싱긋 웃었다. 그를 본 기억은 없었지만 주일학교의 사랑스러운 작은 친구들 중 하나 같아서 조그만 그의 손을 꼬옥 감싸 주었다. 곁에서 흐뭇한 눈길로 아들과 나의 대화를 지켜보던 소년의 어머니가 참으로 지혜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헤아리고 최선을 다해 베푸는 선한 마음을 아들에게 가르치는 어머니가 세상의 어떤 어머니보다 훌륭한 어머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캄캄한 밤길에 세찬 눈보라는 계속 불고 있었지만, 소년이 건네 준 촛불의 온기가 나를 포근하게 감싸 주었다. 아마 오래도록 내 안에 꺼지지 않고 살아 있을 것 같다.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고 머뭇거리던 나의 등을 밀어주시고 눈길에 동행하신 주님, 사랑스러운 소년을 만나도록 인도하시고 촛불 선물까지 받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성탄절이 오면,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을 챙기며 정성어린 선물을 준비하고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눈다. 성탄절은 해마다 오고 가지만 올해 성탄절에는 특별히 사랑이 필요한 이들을 찾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게 있는 것을 나보다 더 필요한 누군가와 기꺼이 나누는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하면 그 모든 사랑의 수고를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많이 기뻐하시리라 믿는다. 진정한 사랑이 담긴 선물은 받는 사람의 영혼에 활기와 기쁨을 북돋아 주는 기적의 선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러한 선물은 세상 어디에서도 돈 주고 살 수 없는 귀한 선물이라는 것을 배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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