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이름을 높이려는 인간

기독교계에서 사용되는 말 중에서 가장 오용되고 남용되는 단어는 영광일 것입니다. 흔히 듣는 말이면서 현실과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자신을 높이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어느 것 하나 보탤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인간을 통해 드러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 범죄하고 타락하여 자신들의 창조 목적 자체를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삶을 사는 존재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기사가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여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2-4).

인간들이 뭉쳐 하나가 되어 자신들의 영역을 높이 쌓아 하나님과 견주어 보려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우리의 이름", 곧 자신들의 영광을 높이려는 인간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 후에도 인간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실력으로 하나님과 능력을 견주어 보려는 대담한 태도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셨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그들의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그들을 훈련시켜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법을 주셨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의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행음하여 이방신을 섬기다가 마침내 멸망하여 북이스라엘은 혼혈 민족이 되고 남유다는 다른 나라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그들이 돌아와 유대 공동체가 유지되었지만, 율법은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임마누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 '그리스도 찬가'라고 알려진 내용을 적어 보냈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종의 형상을 취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신 그분은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빌 2:6-8). 예수님은 당신에게서 신성의 모든 특권뿐만 아니라 성공과 통제, 부와 지위 그리고 권세까지 모두 비우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비워 사랑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성령이 넘치는 그릇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수님을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 2:9-11).

참 인간이 무엇이며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로 살 수 있는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떤 것, 우리들이 이룬 어떤 일, 또는 우리가 그 무엇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비울 때 성령과 평화로 가득 차게 됩니다. 주님처럼 죽기까지 복종할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드러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창조이며 참된 인간의 회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즉 신적 사랑과 평화로 가득 차게 될 그릇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릇된 관념과 욕망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비우고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자신을 연합시켜 참된 자아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참 인간으로 회복될 뿐 아니라 인간 본연의 창조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과 섬김의 참된 능력을 겸비하여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고 보존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경험하기 위해서 낡은 생명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생명이 들어설 공간을 만들기 위해, 우리 안의 모든 집착과 헛된 추구들을 비우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찬가'를 그토록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그 모습이 우리가 영원토록 따라야 할 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비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세포 하나까지 저항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비워야 합니다. 주기도는 강력하게 그 이유를 강조해 줍니다.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비우지 못하게 하는 신화들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비우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세상이 강요하는 것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부모와 동료들 그리고 사회의 교육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서 생존하고, 잘 살기 위한 지식들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것을 거스른다는 것은 곧 세상과의 결별을 의미할 정도로 그것은 큰 힘을 가지고 우리를 몰아갑니다. 모든 시대는 인간들에게 세상의 신화를 가르치고 강요합니다. 그 실상을 파악하고 따르지 않기로 결심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울 수 없습니다. 세상의 신화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워야 살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따르지 못하게 합니다. 당연히 그 길을 걷게 되면 우리는 참 인간으로 회복되지 못함은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는커녕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범죄한 인간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움켜쥐고 있는 신화들을 인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신화들은 이미 우리의 내면 깊이 자리 잡아 우리의 일부분이 되어 있습니다. 내면화된 신화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들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신화로부터 벗어나는 길입니다.

1) 완벽의 신화

"인간의 삶의 목표는 선택한 영역에서 최고가 되고자 계속 시도하는 가운데 자신을 지속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완벽을 이루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완벽할 것을 요구합니다. 최소한 자신이 선택한 영역에서 최고가 되어야 합니다.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완벽을 향해 지속적으로 향상해야 합니다. 이 완벽의 신화가 우리 자신을 비우지 못하게 하는 첫 번째 신화입니다.

이 신화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삶의 목표는 결점 하나 없이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완성되어 원숙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거나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통해 부르신 사명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비워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완벽해지려는 노력을 그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완벽해지지 말고 원숙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깨어 있으려는 노력, 상황을 명확히 보려는 노력, 그리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계속 구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영적 깨달음은 한 순간에 찾아옵니다. "아! 그렇구나!" 하는 순간 우리는 깨어납니다. 깨어 있으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족의 비밀입니다.

온전함은 사랑과 공감과 자비와 공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점수, 돈, 유명세 같은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완벽이라는 신화를 버리고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때, 우리는 원숙해지고 사명을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그릇이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2) 통제의 신화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가능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세상은 우리가 인생을 책임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통제 범위를 벗어납니다. 그 실상은 이렇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과정은 타인과 피조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언제 붙들고 언제 내려놓아야 하는지 분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이 우리가 조절해야 할 유일한 것이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우리가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지나친 통제의 욕망은 두려움이나 불안정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내어줌을 배워야 합니다.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진실에 가까워지려는 것입니다. 내어줌을 통해 상호의존을 배우고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의탁을 배우게 됩니다. 개인적인 통제에 대한 집착, 자기 강화를 위한 힘의 사용은 은혜에 대해 문을 닫는 것입니다. 통제에 대한 집착을 비울 때 우리는 성령과 하나 되는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 축적의 신화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승리한다."

세상에서는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64%의 사람들이 '더 많은 부'가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부가 행복을 보장해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부를 소유하면 어느 정도 행복해질 수 있지만 그 이상이 되면 오히려 더 불행해진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실상은 "부의 축적은 성취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다양한 차원의 수많은 욕망과 행복이 존재하는데, 축적은 그 중 하나에 불과하다."입니다.

축적은 집착을 수반하고, 집착은 영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커다란 장애입니다. '더 많을수록 더 좋다'는 말은 문화적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진보는 더 많은 물질이나 인정받음이 실제로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이루어집니다. 축적의 신화를 비울 때 우리는 영적인 씨앗이 싹틀 수 있는 기초를 놓은 것입니다. 그 씨앗이 싹트기를 기다릴 때 우리는 새로운 기회를 맞이할 것입니다.

4) 무한의 신화

"한계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 시대의 완벽한 승리자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

긍정의 힘과 같은 사고가 이것입니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등의 사고는 바로 인간이 한계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자기 암시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피조물입니다.

그 실상은 이렇습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가 하는 일과 가는 곳을 제한하는 일련의 특별한 기술들과 재능들을 가진다. 그러한 제한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자신이기도 한 이유는 그 제한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유일한 기술을 요구하는 특정한 길에 집중할 수 있는 반면, 우리가 가지지 못한 기술을 요구하는 길들을 단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알아야 할 것은 자기 한계입니다. 자기 한계를 아는 것이 자기답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우리의 출생과 죽음이 우리 삶의 틀이며 경계요, 해변의 기슭, 즉 한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한계는 우리의 독특함을 특징지어 줍니다. 우리의 한계야말로 우리를 빛나고 독특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깨달음을 가질 때 우리는 무한의 신화에서 벗어나 감사와 만족의 영적 여정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5) 개인주의 신화

"나는 나 자신의 운명에 홀로 책임이 있으며, 내 배의 선장이며, 내 운명의 주인이다. 타인에 대한 의존은 나약함을 드러내는 표지일 뿐이다."

우리 시대의 문화적 특징은 개인주의입니다. 개인주의가 깊이 각인되어 있고 당연시되고 있기 때문에, 본질적인 건강과 온전성의 원천이 되는 관계의 필요성은 폄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떨어짐과 함께함이 모두 필요한 존재입니다. 더 중요한 것을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함께함이라고 답해야 하는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개인주의 신화의 실상은 이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 종이라는 보다 큰 체계의 일부이다. 이 종은 따로 떨어진 개인이면서 동시에 타인에게 의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역설적인 특징을 가진다. 그것이 인간이 처한 곤경이다."

개인주의 신화는 개인으로 하여금 모든 것에 뛰어나고 모든 상황을 통제하도록 압력을 가합니다. 이 둘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면을 쓰게 됩니다. 세련된 사회적인 가면을 쓴 채, 성공하고 행복한 인상을 주려고 애쓰지만, 외로움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 신화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적 본성을 앗아가며, 감사와 은혜를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도 강탈합니다. 무엇보다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고립된 인간은 사단의 손쉬운 먹잇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사단은 가능한 한 모든 인간을 섬처럼 고립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주의로부터 벗어나 성령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영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절대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6) 행복의 신화

"우리가 지구에 사는 이유는 영원한 지복으로서의 행복을 발견하고 유지하기 위함이다. 행복하지 않다면, 타인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행복을 가장하는 데 능숙해져야 한다."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 고통과 즐거움을 모두 경험해야 합니다. 즐거움만 경험하고 고통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즐거움도 고통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피하려는 시도는 최악의 경우 우울과 분노, 심지어 신경증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람은 의도와는 반대로 불행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행복의 신화의 실상은 이것입니다. "현실에서 행복은 의미 있는 성취의 삶을 영위하는 한 측면일 뿐이다. 행복을 누리기 위해 인생의 난관과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행복을 달성하는 데 장애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평온한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종, 선택하신 백성, 가장 사랑하는 아들은 비참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고난 받는 종).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참되도록 부르십니다. 우리의 실제 현실이 난폭하고 비참하고 불공정하더라도, 그런 현실에 우리가 충실할 때 하나님은 연민과 칭찬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왜 고통은 존재하는가? 고난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것입니다. 고난의 목적은 지혜이며, 지혜의 목적은 자유이며, 자유의 목적은 공감이며, 공감의 목적은 사랑이며, 사랑의 목적은 영광입니다.

7) 선함의 신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도덕적 규약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해지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모순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다가와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르는 청년을 향해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 18:19). 우리가 만든 선의 기준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선함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인정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선하다고 인정받고 싶기 때문에 존재가 아니라 행위에 몰두하게 됩니다.

선함의 신화의 실상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본성, 즉 하나님과 우리 자신, 그리고 서로간의 관계성 속에서 우리의 본성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악의 뿌리가 깊이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는 제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웃들을 불쌍히 여기며 용서라는 신적 해결 방식을 따라 살게 됩니다.

자신이 선하다는 생각이야말로 교만이며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그런 모습을 보고 돌이켜 자신의 뜻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의 길로 돌아선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크신 자비를 경험하고 용서와 평화를 실천하는 하나님 백성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영광을 돌리려는 사람들은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비움을 아는 것만으로는 우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우리를 비우기 위해 구체적으로 버려야 할 것, 털어버려야 할 사고 체계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상의 신화들은 세상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복음을 믿고 따르는 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삶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례 요한을 가장 본받아야 할 인물로 제시하기 위해 복음서의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습니다. 그의 위대한 점은 하나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바로 그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복음은 끝없이 자기 강화를 요구합니다. 그런 요구가 세상에서는 무언가를 이루게 하지만, 결국 '그는 망하여야 하겠고 나는 흥하여야 하리라.'의 길을 걷게 됩니다. 성경은 "서로 영광을" 취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헛된 영광입니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는 것입니다. 오직 영광이신 분은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태초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세례 요한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만이 영광의 본체이신 그분으로부터 진정한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광 그 자체이십니다. 그분의 영광을 빛나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 그분에게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시기로 태초에 작정하셨습니다. 우리가 소유와 재능과 노력 등을 통해 그분께 영광을 돌릴 때 그분은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당신의 영광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영광 안에서 우리와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세례 요한처럼 모든 영광을 그분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타락한 심령을 기억하며 늘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했던 세례 요한의 삶의 태도를 가지는 것이 바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고 기도하는 제자들의 도리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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