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 대해 관심 갖는 것을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세상적인 필요를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돈이 있어야 하고 먹을 것이 있어야 하고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방도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선순위입니다. 이제 주기도에 대한 마지막 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것은 순서이며 순서에 입각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 살펴볼 말씀이 '아멘'이기 때문입니다.

아멘은 이제까지 살펴본 모든 것들에 대한 동의인 동시에 각오이며 한 번 더 주님께 믿음으로 청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를 꼭 이루어 주십시오.'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원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내용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멘을 드리기 전에 주기도의 모든 청원들을 돌아보고 아멘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

아멘은 히브리어 '아멘'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진실로 그러하도다."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는 몇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째, "진실로 그러하도다," "진정으로 동의합니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둘째, 노래의 후렴구와 같이 찬양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진실로 그러한 것을 찬양하나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감사와 감탄, 섭리에 대한 놀라움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보겠습니다. 셋째, "진실로 그러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기도한 내용을 "이루어주십시오."를 넘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을 믿는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1) 진실로 그러합니다.

아멘은 본래 강한 긍정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한 긍정의 의미로 아멘은 사용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바람이나 축복의 내용뿐 아니라 저주를 포함한 모든 내용에 대해서도 동의를 넘어 반드시 그렇다는 믿음이 아멘에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요단을 건넌 후 마침내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요단 강에서 가져온 돌들로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린 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 나누어 세운 후에 그들로 하여금 맹세를 하게 합니다. 먼저 저주의 내용에 대해 그리고 복에 대해 선포하는데, 저주의 내용을 선포할 때에는 백성들로 하여금 "아멘"을 외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을 선포할 때에는 "아멘"을 외치게 하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27장에는 12개의 저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저주가 선포될 때마다 이스라엘은 아멘을 외쳐야 했습니다.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16).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17).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26).

하지만 축복의 내용이 선포될 때에는 "아멘"을 외치라는 말이 없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리라"(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2-7).

이 신명기 기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저주의 내용에 대해서도 아멘 하는 사람이 될 때 우리의 삶 전체를 아멘 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자신의 삶 전체에 대해 아멘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기도의 내용은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들임이 분명합니다. 내 일을 제쳐놓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먼저 생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충분한 양식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그것도 다른 이들의 것까지 구하는 기도는 우리의 본성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 내용들에 대해 흔쾌히 아멘이라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주기도의 내용에 대해 기꺼이,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아멘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기도에 대해 아멘 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모든 기도에 대해서도 아멘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는 기도의 위기입니다. 우리 모두 기도를 합니다. 밤새워 기도합니다. 새벽을 깨우며 부르짖습니다. 문제는 기도의 내용과 방식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아뢰느라,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 나라는 안중에 없거나 구색 맞추기 정도로 끼워 넣습니다. 주기도에서 말하는 기도의 순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는 쌍방 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하려고만 하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방식이 잘못되었습니다. 기도는 듣는 것입니다. 자신의 청원을 아버지께 아뢴 후에 아버지의 뜻을 살피고 기다리면서 분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이 되게 하고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기도는 행동이며 동시에 사고입니다. 바른 기도를 드려야 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기도는 바른 기도이며 기도의 모범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주기도를 자주 드려야 합니다.

바른 기도를 드리면 전혀 다른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도 자체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기도하게 하시는 것 또한 주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침내 신실하신 하나님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어느 곳에나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자비는 한량이 없습니다. 그런 분이 먼지 한 톨에 불과한 우리를 기억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그분이 아십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그분이 허락하시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와 동행하시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문제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온전히 아멘의 존재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정을 믿기에 환난 속에서도, '아멘' 할 수 있습니다. 아멘은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2) 찬양

시편 41편 13절은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아멘. 아멘"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찬송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아멘, 아멘이라 부르짖고 있습니다. 시편 106편 4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 하나님에 대한 감동이 아멘으로 터져 나와 할렐루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4:20는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으로 끝을 맺습니다. 감동이 찬양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튀어나오는 말이 아멘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정말 그렇습니다. 주님, 그런 주님을 찬양합니다.' 라는 의미를 담아 “아멘”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회복해야 할 마음은 찬양의 마음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냉랭한 것은 찬양의 마음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눌리고 돈에 집착하여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찬양의 마음이 있으면 삼라만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감사하고 찬양하게 됩니다.

찬양의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필연입니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섭리와 예비하심이 담겨 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찾아 그것을 따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고 말합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분의 섭리 안에서 계획된 길을 걷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대의 무감동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냉정함을 녹여야 합니다. 모든 것에 녹아 있고 스며들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찬양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물을 무덤덤하게 바라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신앙이 모든 사람들을 시인으로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찬양은 인생을 기쁘게 만듭니다. 찬양은 인생을 능력 있게 만듭니다. 시편 119편은 "주의 의로운 규례를 위하여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164)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딱딱한 규례조차 의롭게 느껴집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에도 그 같은 찬양이 들어 있습니다. "나라가 오직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라는 고백에 아멘으로 화답할 때,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참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감격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권세가 오직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라는 고백에 아멘으로 화답할 때 우리는 "모든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세상을 거슬러 살 수 있습니다."라는 마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영광이 오직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라는 고백에 아멘으로 화답할 때 "우리 인생에 목적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3) 진실로 그렇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진실로 그렇게 될 것을 믿습니다.“는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이란 아직 이루어지지 않거나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아멘'이 남용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목회자의 흥을 돋우고 설교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자세로 '아멘'을 외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아멘'이란 순수하게 하나님을 향한 우리 마음의 반응이어야 하는데, 그것이 사람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멘'이란 우리가 드린 기도에 대한 믿음과 확신입니다. 기도에는 반드시 믿음이 필요합니다. 기도한 내용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믿음이 있어야 제대로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기도에 이어지는 산상수훈에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0-31)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기도란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아멘은 우리의 연약함을 떨쳐버리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아멘'으로 믿음을 고백하고 난 후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능력과 사랑을 의심하면서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기적은 믿음이 있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삶 자체가 기적임을 깨닫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기도하면 그대로 될 줄로 믿어야 합니다. '아멘'은 바로 그러한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멘'의 주님이셨습니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계 3:14)라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주님은 '아멘' 그 자체이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일에 있어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19-20). 주님은 아멘의 주님, 순종의 주님이셨습니다. '아멘'이 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우리 또한 '아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멘'이 되어야 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의 삶

아멘의 사람이 되려면 아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낳는다.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낳는다. 습관을 심으면 성격을 낳는다. 성격을 심으면 운명을 낳는다."(새뮤얼 스마일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멘으로 주님께 화답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 안에서 모든 일을 보는 그런 삶입니다.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권면합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위해서, 주님과 함께, 그분의 사랑으로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에게 삶의 우선순위는 주님과 그분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주님께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눈은 항상 주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항상 마음의 눈을 주님에게로 향할 수 있는 비결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온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그분을 사랑할 때 '아멘'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입술의 고백을 넘어 우리의 삶이 '아멘'의 삶이 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멘의 삶입니다. 순종의 삶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는 삶입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이다. 아멘!"을 주님께 드린 다음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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