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

나훔에 대해서는 이름과 고향이 엘고스라는 것만 알려져 있습니다. 엘고스가 어디 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나훔은 "여호와께서 위로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유다가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낼 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유다 백성을 위로해준 선지자입니다. 그의 활동 시기는 나훔서에 기록된 두 사건으로 미루어 주전 663년과 612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보통 주전 650년경으로 봅니다.

나훔은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의 멸망을 예고한 선지자입니다. 그가 예언을 할 당시 아시리아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아시리아는 고대 근동 세계에서 가장 잔인하고 포악했으며, 그 지역을 1세기 이상 지배하였습니다. 아시리아는 고대 근동 국가들의 공통적인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아시리아에 대한 멸망 예언은 유다에게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나훔서는 가장 강력한 세상 권세라 할지라도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종결시킬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결코 불의가 승리하지 않도록 통제하시고, 당신의 정의가 실현되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나훔서의 핵심 메시지는 1:2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도덕성이 뒷받침 되지 않는 세상의 권세는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이 흩으신다는 것입니다.

배경과 구조

니느웨는 크고 오래된 도시였습니다. 주전 5천 년경 오늘날의 모술 반대편에 있는 티그리스 강 동쪽에 생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전 8세기 말 아시리아의 왕 산헤립(주전 704-681)이 수도로 만들기 전까지 니느웨는 변천의 역사를 겪었습니다. 산헤립은 25년에 걸쳐 옛 도시를 복구하고 확장하여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신전과 성벽, 궁전과 수로,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왕이자 건축가인 에살핫돈과 앗술바니팔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때가 아시리아의 황금기였습니다. 아시리아 제국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애굽부터 페르시아 만까지 비옥한 땅이라고 불리는 지역 전체를 차지했습니다. 세계 역사상 최초의 대제국을 이룬 아시리아의 궁전에는 속국에서 가져온 재물들이 넘쳐났습니다. 아시리아의 성벽은 이중으로 되어 있어 어떤 침공에도 끄떡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아시리아를 대적할 수 있는 나라는 당시에 없었습니다.

그 니느웨가 주전 612년, 바벨론과 메데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합니다. 전성기를 맞이한 지 불과 25년 만에 멸망한 것입니다. 역사가 댈글리쉬는 갑자기 창궐한 질병, 학문에만 몰두한 왕, 내란이 그 원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나훔의 예언은 다릅니다. 원수들에게 격노하시며, 세상의 통치권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합니다. 선지자의 눈은 역사 너머를 바라봅니다.

표제 (1)

나훔서에는 두 개의 표제가 있습니다. 첫 번째 표제는 니느웨에 대한 경고이고 두 번째는 나훔에 대한 설명입니다. ‘경고’로 번역된 '마사'는 '신탁'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선지자의 신탁을 의미하는 전문 용어입니다. 실제로 나훔서의 메시지는 표제에 명시된 것처럼 니느웨에 대한 경고의 말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훔의 말씀이 유다 백성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 이유는 그 말씀이 자신들에게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특성 (2-3a)

2절과 3절 전반부는 여호와의 특성을 나열합니다. 출애굽 이후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었다."라는 배타적 언약관계가 성립되었습니다. 따라서 둘 사이에 누군가가 개입하여 한쪽의 마음을 훔쳐 가면 질투가 발동됩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두 번째는 보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중요한 개념입니다. 2절에서만 무려 3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부정적 의미의 보복과 달리, 하나님의 보복은 구원사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정의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거스르는 자에게 보복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것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구원 행위를 의미합니다. 거룩하고 정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악과 부정에 대해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분의 절대 주권을 드러냅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보복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정의를 실현하실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다윗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을 반역한 아들 압살롬과 그를 따랐던 대신들에게도 강력하게 보복하지 않습니다. 보복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영역에 속해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존중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척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분입니다. 질투로 인해 진노하고, 그 결과로 보복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셋은 하나로 연결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란 자기 스스로 신이 되려는 사람이나 하나님 없이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입니다. 이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뜻하는 헤세드와 짝을 이루어 나타납니다. 그런데 나훔서에서는 강한 능력, 즉 권능을 가지셨다는 말이 그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 세상의 불의를 참고 계신 것이 아니라 참고 계실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참고 기다리기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선 나훔을 통해 벌 받을 자를 그대로 두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조의 하나님 (3b-5)

3b-5절에서 심판을 결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능력은 하나님의 창조 사건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창조 사건을 말하는 것은 그분이 모든 피조물을 주관하시는 주권자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3절 후반부와 5절은 모두 하나님이 등장하시는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회오리바람이나 폭풍우를 동반하여 등장하십니다. 이런 표현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절대주권자라는 고대의 표현 방식입니다.

여기서 꾸짖으시는 하나님의 시제가 현재진행형의 능동 분사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완료형이 아닙니다. 그분은 지금도 온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이런 시제를 통해 나훔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적이요, 나아가 하나님의 대적인 아시리아의 멸망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행위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6-8)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단단한 반석도 안전지대가 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분노하신 하나님 앞에 누가 설 수 있겠습니까? 7절을 원문의 순서로 보면 '선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입니다. 선하심을 먼저 언급함으로써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 18:19)고 단언하셨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는 말의 의미를 신중하게 들어야 합니다. 인간의 선은 절대로 절대적으로 선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차선책으로서의 선함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반역자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선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을 상실하는 순간, 인간의 선함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일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나훔은 7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두 가지 예를 제시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환난에 처하면 도피처를 제공해 주십니다. 그분은 선하신 분입니다. 돈과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산성이십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께 의뢰하는 자들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믿는 우리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말입니다. 세상에 믿는다는 이들은 정말 많은데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뢰하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기복신앙이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풍요의 신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알이 아니십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의뢰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아십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없지만 8절은 원문에서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선하신 분이지만 또한 죄인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죄인을 심판하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선하심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악이 승리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악을 어둠 속으로 몰아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궁극적인 희망

나훔서에는 회개와 용서, 희망의 메시지가 없습니다. 대부분이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나훔서를 "증오의 찬송"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만을 지지하는 편파적인 신학 책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 우주와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우매함의 표현입니다. 그분은 선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매우 더디 하시는 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드러냅니다. 당신의 피조물들이 당신께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권능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과정을 통해 온전한 선을 이 땅에 구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죗값을 물으시고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에게 전적으로 의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분노는 자비로 바뀌지만 하나님을 떠나 우리 자신이 신이 된다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세계의 한 부분입니다. 결코 전체에서 분리된 독립된 존재인 것처럼 오만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전체의 일부로서 특정 시간과 장소에 뿌리내리고 주어진 삶의 필연을 찾아야 합니다. 유한한 조건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희망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나는 편도나무에게 말했노라.

 

편도나무야, 나에게 신에 대해 이야기해다오.
편도나무야, 나에게 신에 대해 이야기해다오.

 

그러자 편도나무가 꽃을 활짝 피웠다.(편도나무에게, 니코스 카잔차키스)

우리들도 각자 머무는 곳에서 복음의 꽃을 피운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 속에서 피조세계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없다면, 우리는 복음을 따라 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진노하시는 분이고, 당신을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만이 궁극적인 희망임을 증언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런 우리에게 자비가 될 것이며,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정의가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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