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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최태선 목사  |  어지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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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2.06  02: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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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21-24).

아모스

아모스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여로보암 2세의 전성기였던 주전 760년경에 활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적 안정과 함께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왕하 14:23-29). 육로와 행상에 걸쳐 국제무역이 활발히 전개되었고(암 6:13), 포도주와 곡식을 팔아 부자가 된 신흥계급이 생겨났으며(암 8:4-6), 사치스런 여름 별장과 겨울 별장도 등장했습니다(암 3:15). 이런 집들은 고가의 수입품인 상아들로 장식되었습니다(암 6:4).

그러나 사회적인 빈부격차가 심해졌습니다. 위화감이 조성되고(암 2:6-7), 사회적 약자들의 마지막 보호자가 되어야 할 사법부조차 뇌물에 매수되어 약자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사라졌습니다. 어디 가서도 그것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암 5:10-12).

아모스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8km 떨어진 작은 성읍 드고아 출신이었습니다. 아모스는 남 왕국 유다 출신으로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본디 양을 치고 뽕나무를 가꾸는 자였습니다(암 7:14-15). 목자라는 말에 '노케드'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비교적 부유한 목축업자였을 것입니다. 그는 부패한 이스라엘의 종말을 선포합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아모스는 "정의"의 선지자 혹은 예언자라고 불립니다.

배경

아모스 5장 21-24절은 보통 "제의 비판"이라 불리는 부분입니다. 소선지서 가운데 최초의 문서인 아모스가 첫 포문을 연 "제의 비판"의 주제는 이후의 선지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사 1:10-17, 미 3:9-12, 렘 7:1-15 등). 그 내용은 아모스 4장 4-5절과 관련됩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 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 "가서"라고 옮긴 히브리어의 원뜻은 "오라"입니다.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성소로 오라고 초대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길갈과 벧엘, 두 장소를 언급합니다.

벧엘은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던 중, 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돌단을 쌓은 후 예배를 드렸던 곳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벧엘은 이후 분열왕국 시대에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 1세가 단을 쌓은 곳이기도 합니다.

길갈은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진입하여 처음으로 진을 친 곳입니다. 요단강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돌을 가져다가, 이스라엘 언약궤가 요단강을 지날 때 그 물이 갈라졌던 것을 기억하도록 그 돌들을 길갈에 세웠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능하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이스라엘이 영원히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후 벧엘과 길갈은 이스라엘에게 성소가 되었고, 제사장들은 그곳에 가서 제사할 것을 권고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이 너무 이상합니다. 그곳에 가서 "범죄하며" "죄를 더하며"라고 말합니다. 일종의 패러디입니다. "제사를 드려 너희 죄를 속하라"는 말 대신 "죄나 실컷 짓고 오라"고 말합니다. 성소가 죄를 씻는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죄를 더하는 자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성소를 찾으라는 말은 거룩한 곳으로 가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거룩한 분"을 만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5장 4-5절은 그것을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변질된 예배는 하나님과는 무관한 종교놀음 또는 형식주의에 빠져 자기만족을 추구하도록 만듭니다. 형식적인 예배는 있으나 진정한 예배가 없는 삶, 그것이 북 이스라엘의 현실이었습니다. 우리도 예배를 드리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간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예배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예배

1) 절기와 성회의 거부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먼저 하나님께서 절기와 성회를 거부하십니다. 절기와 성회는 이스라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예배의 기본이었습니다. 여기서 '멸시하다'의 히브리어 단어 '마아스'는 '버리라‘는 의미로 거절할 때 사용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강한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버리심은 하나님에 대한 배반과 반역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절기 거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거부에 대한 반응입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 절기와 성회를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분명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각종 절기 헌금을 빠지지 않고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예배를 거절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드리는 절기와 성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즐기는 의례적인 행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가 아니라 자신의 뜻과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어 결국 예배가 자신을 섬기는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2) 제사의 거부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22).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제사 자체를 거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드리는 모든 제사를 인정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심지어 거들떠보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제사를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제사의 참된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3) 찬양의 거부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23).

노랫소리와 비파 소리마저 거부하십니다. 여기서 ‘소리’를 뜻하는 히브리어 '하몬'은 전쟁의 소리, 혹은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내는 소음과 같은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코를 막고, 눈을 닫고, 귀를 막아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형식적인 제사 행위가 보기 싫어 하나님께서 괴로워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의 자리가 하나님을 고문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4) 공법과 공의의 실종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하나님은 더 괴로워하시고, 그 예배 때문에 화가 나십니다. 정의 '미슈파트'와 공의 '체다카'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공의가 없는 예배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니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의와 공의는 동의어로 쓰였으므로 두 단어를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와 사회의 공동체 의식이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새 사람

한 사회의 정의와 공의의 척도는 그 사회의 약자들이 제대로 보호되고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약자들의 탄식이 그치지 않는 곳에서 드리는 예배는 무익한 허례허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다고 믿는 제사 혹은 예배를 철저하게 배척하시고, 비종교적이고 세속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정의와 공의에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이것은 제사법이 윤리 혹은 도덕법을 앞서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윤리적, 도덕적 삶이 종교적 의식보다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윤리적 삶으로 대신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배와 도덕적 삶이 분리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 서신에서도 믿음 혹은 교리와 도덕은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설명이 끝나면 반드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와 함께 윤리적인 권면이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신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는 새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에베소서의 경우, 앞의 3장은 교리적인 해설이고 뒤 3장은 윤리적 권면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의 사람들을 나와 똑같은 형제자매로 대해야 합니다. 그들의 어려움과 아픔을 내 것처럼 느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소유의 포기는 오히려 하찮은 것입니다. 참된 공감과 긍휼은 반드시 십자가라는 자기 희생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함 삶이 교회의 벽을 넘어 우리가 속한 사회를 향해 똑같이 이어져야 합니다. 어리석어 보이고 불가능해 보이지만 복음은 몽상가들의 착각이 아닙니다. 예배는 몽상가들의 꿈처럼 보이는 일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공급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당신의 능력과 풍성함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예배가 예배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모스가 질타한 이스라엘의 제의 비판은 오늘날의 교회 예배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탐욕을 합리화하여 결과적으로 자기를 경배하고 있는 예배는 하나님 없는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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