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요한복음 6:60-71).

영원한 생명

예수님께서는 54절과 56절에서 똑같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이라는 말로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54절에서는 "영생을 가졌고"라고, 56절에서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문장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곧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주님과 우리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너무도 간단하고 분명한 이 진리의 말씀은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제자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의 그 말씀이 제자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리의 말씀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존재인데, 동시에 혼자선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태생적으로 서로 역할이 나뉘어 협동하는 벌이나 개미와 같은 동물과는 달리,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과학도 철학도 온전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인간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길은 성경 안에 있습니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유일한 피조물이 인간이라고 설명합니다.

선악과 사건은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과 분리 없이 존재하도록 창조된 특별한 피조물이 독립을 선언하고 하나님과 갈라선 이후, 인간은 영원을 갈망하게 되었고, 예수님은 영원에 속할 수 있는 길, 즉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목표에 도달하려면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동안 자신의 생명처럼 여겨왔던 독립입니다. 인간에게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스스로 신이 되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신앙을 가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후자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난 것은 신이 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이란 인간을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인간이 만든 신, 혹은 인간에게 종속된 신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신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버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하나된다는 것,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며, 신적인 지위를 갖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 선택 앞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제자들이 "어렵도다"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열두 제자

이제 예수님은 마지막 남은 열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질문을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열두 제자인 너희들은 나를 떠나지 않을 거야, 그렇지?"입니다. 원문은 '메'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메는 질문자가 상대에게 부정적 응답을 기대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저희가 떠날 리 있습니까?”라는 제자들의 반응을 기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제자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났을 때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그런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다행히 열두 제자는 예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열두 사람을 대표하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68)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자 애쓰시는 말씀의 핵심을 파악하고 정곡을 찌르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느끼셨을 아픔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반복되었던 하나님의 아픔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독립을 추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배반하고 떠나간 이스라엘을 벌하시기보다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권하셨습니다.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2).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호 6:4).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아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열두 제자를 가리키는 '도데카'라는 말이 처음 이곳에 나옵니다.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과 달리 열두 제자를 임명하는 기사도 없고, 열두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제자직에 대한 설명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60년이 지난 뒤에 권위와 권위주의가 구분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 공동체 안에는 권위주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일부러 열두 제자라는 단어를 기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요한복음 기자가 그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릅니다. 권위는 공동체의 선을 위해 사용되고 사랑의 섬김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권위주의는 권위를 받은 자가 교회의 공동선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권위를 행사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권위의 남용입니다. 권위주의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그리스도의 양들인 성도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요한 공동체는 권위가 아니라 권위주의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권위를 내세우는 권위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을 질식시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으로부터 벗어나 옛길로 돌아가 스스로 신이 되는 것입니다. 권위주의가 아니라 권위가 살아 있는 교회가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사랑의 길에 들어서 있다면 너무 쉬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유다의 배반

베드로의 신앙고백 후에 바로 유다의 배반 행위가 소개됩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마귀란 사실을 밝힙니다. 요한복음은 시종일관 유다를 배반자의 모델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베드로는 제자직분의 모델로 제시됩니다.

유다는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라는 정식 호칭으로 소개됩니다. 당시 유대사회는 아버지와 출신지를 함께 소개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아버지뿐 아니라 유다 자신도 가룟 유다라고 불립니다. 원문대로 읽으면 '이스카리옷'입니다.

이스카리옷은 '카리옷'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카리옷 사람이라면 아들인 유다 역시 카리옷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아버지와 아들 모두 당시 '젤롯'이라고 불리던 열심당원 혹은 혁명당원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스카리옷에서 '이스카리'는 자객을 가리키는 시카리우스를 연상케 합니다. 자객을 '시카리우스'라고 불렀던 이유는 열심당원들이 로마인들이나 로마에 협조하는 유대인들을 죽이기 위해 품에 '시카리'라는 단도를 품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객이 아니라 독립 운동가들이었습니다.

유다가 왜 배반의 대명사가 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열심당원이었는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은 그가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는 또 신실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공동체의 재물 관리를 맡았습니다. 그는 가장 현실적인 행동파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신적인 힘으로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해 줄 영웅이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에게 그런 메시아를 기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길은 그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분은 무력 항거를 언급하지 않으셨고 급기야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다는 무력항쟁을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비폭력을 고수하셨습니다. 마침내 체포의 순간이 다가오자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현실적인 행동주의자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끝까지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비울 수 없었습니다. 현실적 목표를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길이 비현실적이며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불가능 앞에서 그는 현실적인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식을 따랐고, 그것이 결국 그를 마귀로 만들었습니다. 유다가 악하다거나 개인의 탐욕이 지나치다는 식으로만 파악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현실적인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라는 불가능한 방식 앞에 순복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방식을 버리지 못했던 그는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가능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방식, 즉 진리의 길은 현실적 행동주의자에게는 무의미해 보이거나 불가능해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최근 들어 저는 예수님의 복음이 현실 세계 안에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유다가 고민하는 시점이 저와 비슷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의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그분을 따르는 길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길은 자신의 방식대로 현실 속에서 가능한 방식을 따르는 것입니다. 유다는 두 번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불가능을 현실로 만드는, 그것도 어떤 결핍의 현상도 없이 완벽한 결말을 이루는 하나님의 '샬롬'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신앙의 여정에서 고비마다 선택해야 하는 길림길입니다. 부자 청년의 기사에서 예수님께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눅 18:24-25)라고 하시자 제자들은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라고 반문하였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의 사고로는 이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야말로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힘이었고, 그들도 오늘날의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부를 하나님의 축복이라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27)고 말씀하십니다. 불가능한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 것은 사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된 사람은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과 하나된 사람은 하나님과도 하나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그 일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신앙 여정에서 불가능한 것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직 진리의 길에 들어서지 못한 것입니다. 복음은 공동체에 주어진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불가능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 없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진리의 공동체가 아니며 하나님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불가능 앞에서 현실적인 방식을 택한다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 유다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방식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것만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길의 끝은 죽음입니다. 유다에게도 베드로에게도 은혜의 문이 똑같이 열려 있었습니다. 유다가 잘못된 선택을 뉘우치고 베드로처럼 통곡하며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면 주님의 은혜가 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 가능성만을 신뢰하는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자살이었고, 그의 피가 흐른 밭은 저주의 땅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가 진짜 교회라면 수많은 불가능 앞에 직면해야 할 것입니다. 그 불가능 앞에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가능한 불가능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길을 택할 것인가, 그 두 갈래 길 앞에서 고민하는 일들이 주기적으로 닥칠 것입니다. 그때마다 교회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그 교회가 진짜 교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불가능 앞에서 좌절하고 고민하지 않는다면, 교회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유다의 길을 걷는 교회일지 모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불가능의 길을 끝까지 걷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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