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분만 얘기 좀 하자는 아내의 말에 아들은 굳은 표정으로 되물었습니다. “왜요?” 말투에 긴장감이 느껴졌습니다.  하긴 늘 하는 게 이야기인데 새삼스럽게 10분이라는 시간을 정해 식탁으로 오라고 하니 당연한 반응일 것입니다. 구조조정 시기에 부장으로부터 차 한 잔 하자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과연 차만 마실 거라고 생각하는 직원이 있을까요.

드디어 아내의 입이 열렸습니다. 최근의 아들 행적을 나열하고, 고쳐야 할 습관의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시간 관리, 성적 관리 등에 관한 생각을 말했습니다. 이럴 때 아내는 M16 자동소총보다는 M60 기관총에 가깝습니다. 쉴 틈 없지만 묵직합니다. 남편이자 아빠인 저는 옆에서 숨을 죽이고 정세를 분석하며, 속으로 응원합니다. 누구를 응원하냐구요? 비밀입니다.

처음에는 대화의 주도권이 아내에게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내는 내심 주제와 내용을 준비해 시작했고, 아들에게는 그런 충고를 들을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끝자락이긴 해도 아들은 여전히 사춘기의 테두리 안에 있었고, 우리와는 많이 다른 문화와 세대에 속해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듣고 있던 아들은  어느 시점이 지나자 조금씩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점차 대등해지더니 때론 아들의 목소리가 더 커졌습니다. 설왕설래, 엎치락뒤치락, 밀고 당기기.

아들의 말을 요약하면,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그것은 내 자유다.”였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대부분의 부모는 안하면 좋을 말을 하게 됩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부모이기 때문이다. 나만큼 널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느냐. 아직 부모의 훈계와 지시를 따라야 할 나이니까.”등등.

이때가 바로 중재자가 나서야 할 때입니다. 대화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으로야 어떻든 최대한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3파전이 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긴장을 완화시키고 서로가 한 말을 재해석해 주거나 표현보다는 그 말의 취지를 강조해 줍니다.

아들의 말을 들어 보니 반복해서 강조하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You can change my habit but you can not fix my behavior.”대체 무슨 말일까요? 아들의 입장에서 change와 fix는 그 의미가 서로 달랐습니다.  change는 A나 B 모두 가능하지만 B로  바꾼다는 의미이고, fix는 A가 틀렸기 때문에 B를 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들은 자신의 생활방식이 틀렸다는 말을 듣기 싫어했습니다. 아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이 있고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네 방식이 틀렸다.”라고 충고해도, 아들은 고칠 마음이 없으며 그런 주장 자체가 틀리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가치관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저는 바울서신에서 그 힌트를 얻었습니다. 옥중서신에서 바울은 예수를 전함에 있어 절대 진리라는 표현 대신에, 더  좋은 것(excellent, 빌 4:8), 위엣것(above all, 골 3:1), 새 사람(New self, 엡 4:24)을 추구하라고 권면합니다. 헬라주의적 사고에 젖어 있는 청중들을 고려한 표현입니다. 바울 설교의 결론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 결론을 이끌어내는 방식은 달랐습니다.

이 시대는 복음이 직면했던 헬레니즘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들의 표현이 이런 뜻이었느냐고 확인하자, 아들은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모든 문제가 풀렸습니다. 아들은 엄마의 충고를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엄마 아빠의 마음을 자신도 잘 알고 있다면서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해피 엔딩이 되어서 모두 다 평안한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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