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온 동네를 시끄럽게 하는 소리에 주디(Judy)는 잠에서 깼다. 밖에서 누군가가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밖을 내다본 주디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난동의 주인공은 바로 주디의 아들 제이슨(Jason)이었다. 아들의 난동을 제재할 방법이 없어 두 손 놓은 채 진정하기만 기다리던 주디는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스스로 경찰을 불러야 했다.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주디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집 나간 제이슨은 가끔씩 찾아와 마약 살 돈을 내놓으라면서 난동을 부렸고, 그런 아들이 무섭기까지 했단다. 남편과 이혼한 후 두 아이를 키우며 정신없이 살아왔건만, 남은 건 이런 난동까지 감당해야 하는 고단함뿐이었다. 한 달 전쯤 겪은 일을 몸서리치며 말하는 주디의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동네 장사를 16년째 하다 보니 손님 모두가 이웃사촌이 되었다. 시원하게 언어 소통이 되는 건 아니지만, 우리들끼리 공유한 역사가 있기에 웬만하면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아가씨였을 때부터 가게에 왔던 진저(Ginger)는 지금 고등학생 자녀 둘을 둔 엄마가 되었고, 아들 장가 보낸다고 드레스를 수선해 간 수잔(Susan)은 어느새 할머니이자 손녀 바보가 되었다. 정년 퇴직을 손꼽아 기다렸던 톰(Tom)은 아내와의 크루즈 여행을 준비하며 신이 났다.

16년 세월을 같이한 동네 사람들 중에서 주디는 늘 마음이 아픈 존재이다. 돈을 버느라 두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사춘기를 보내는 지금 제이슨은 세심한 배려가 필요할 텐데, 주디 혼자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 와중에 제이슨이 마약에 손을 대더니, 걷잡을 수 없이 엇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세 아들을 방치하다시피 키워 온 터여서 주디의 입장이 절절이 이해가 되었다. 요즘 주디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새가 없다.

그래도 주디와 나의 마음이 설레고 있다. 얼마 전 제이슨에게 정말 좋은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제이슨이 주디의 일터에 찾아갔다가, 주디가 혼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본 뒤, 마약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마침 마약으로 어두운 청소년기를 보낸 전도사 한 분을 알게 되어 제이슨에게 소개했다.

잡초를 제거하고 땅을 새롭게 일구는 농부처럼 전도사님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이슨이라는 거친 땅을 거침없이 일구어 나가는 전도사님의 열정에 제이슨은 조금씩 자기를 찾아가고 있다. 나는 제이슨이 인생의 한 고비에서 겪는 시차적응이라 생각하자고 했다. 그가 안정되기를 기다리며, 엄마로서 주디와 나는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중이다. 제이슨이 어서 시차적응(사춘기)을 끝내고 제자리로 돌아와 주기를 기도하며 기다린다.

그리고 언젠가 전도사님처럼 ‘상처 받은 치유자’가 되어, 누군가가 예전의 자신처럼 시차적응을 겪고 있을 때, 진정한 친구가 되는 ‘가치의 부여자’가 되기를 소원해 본다.

어쩌면 우리 모두 이렇게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이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창조주의 적극적인 개입에  화답하여“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되어 각종 열매를 맺는” 인생으로 변하고 있을 것이다. 주디와 제이슨에게도 창조주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개입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오늘 흘린 주디의 눈물이 기쁨으로 재창조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그리고 주디의 입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23편)라고 고백하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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