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사 19:19).

지록위마의 유래와 그리스도인

조고는 법가 사상을 채택한 진나라에서 해박한 법 지식으로 시황제의 총애를 얻어 시황제의 아들 호해의 후견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조고는 시황제의 시중을 들고 잡무를 보는 환관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간신들처럼 강력한 권력자 아래에서 유용한 환관이었던 그는 시황제 서거 시 권력을 잡을 기회를 맞이하게 됩니다. 순행 중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시황제에게 후계자로 내정된 태자 부소가 있었는데, 태자는 조고를 평소에 탐탁지 않게 여겼기에 부소가 즉위하면 권력을 읽을 것이 두려웠던 조고는 승상 이사를 설득합니다.

승상 이사는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하는 동안 진시황의 참모로 큰 역할을 했지만, 법가 사상에 충실하고 엄격한 법 집행으로 인해 내외에 적들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태자 부소가 가혹한 법들의 철폐를 진시황에게 간하며 이사의 정책에 정면으로 맞선 적이 있었고 그 때문에 태자 부소를 몽염 장군이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있는 곳으로 축출하는 데 앞장선 전력이 있는 만큼, 이사 역시 부소의 즉위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불안감을 파고든 조고에게 넘어간 이사는 결국 조고와 함께 진시황의 유서를 위조하는 일에 가담합니다.

조고는 시황제의 죽음을 숨긴 채, 태자 부소에게 시황제의 명이라며 자결하라는 글을 써 보냅니다. 효심이 깊었던 태자 부소는 몽염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살합니다. 부소가 죽자, 이사와 조고에 의해 호해가 황제로 등극합니다. 갑자기 진나라의 황제가 된 호해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고 진나라 조정의 실권은 이사와 조고에 의해 좌우됩니다. 하지만 조고는 몽염 장군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고 승상 이사를 모함하여 그들을 제거했으며, 단독으로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호해는 국정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진나라 조정은 조고에 의해 장악되었고, 점점 대담해진 조고는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기 위해 호해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폐하, 저것은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폐하를 위해 구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승상이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소.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니(指鹿爲馬-지록위마) 무슨 소리요?” 라고 호해가 묻자, 조고는 “아닙니다. 말이 틀림없습니다.” 라고 강변합니다. 호해는 중신들을 둘러보며 묻습니다. “제공들 보기에 이것은 말이요? 사슴이요?”

그러자 대부분은 조고가 두려워 “말이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이 꼴을 볼 수 없었던 일부 중신들은 “사슴입니다.”라고 직언을 했습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대답한 자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죄를 씌워 죽였으며, 이후 진나라 조정에는 조고의 말에 거역하는 자들이 없어졌습니다.

진나라의 수탈에 견디다 못해 진승 오광의 난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유방이 이끄는 군대가 함곡관을 넘어설 때까지도 조고는 이 사실을 호해에게 숨겼습니다. 호해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조고는 호해마저 살해하고 태자 부소의 아들인 자영을 세웁니다. 그런데 자영은 녹록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자영은 조고를 처단하고 삼족을 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늦은 상황이었습니다. 재위 46일 만에 함양으로 들어온 유방에게 항복하여 진나라는 멸망합니다.

이 이야기가 창세기 11장까지의 내용처럼 보입니다. 성경은 에덴을 떠난 가인의 후예들의 역사를 11장까지 그리고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까지 이어지는 성경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인간의 문명을 묘사합니다. 인류가 힘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록위마 이야기는 그런 인류의 삶의 실체를 요약해서 보여줍니다.

부침을 거쳐 멸망에 이르는 인간 역사는 힘을 가진 자들의 횡포로 점철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사회의 모습, 우리가 겪는 문화의 실상은 더도 덜도 아닌 바로 지록위마입니다. 조고가 두려워 사슴을 말이라고 하지 못하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힘을 가진 자의 횡포에 저항할 수 없습니다. 말이 아니라 사슴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에게 닥쳐올 운명은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지록위마의 세상을 바로잡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슴을 말이라 말하고 죽은 중신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영원한 생명 없이 죽음을 당한 중신들의 삶은 정의로워도 개인적으로는 어리석은 선택이라 말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선택은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 마땅히 그래야 하는 올바른 선택입니다.

성도와 성인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성도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영어 성경에서 성도라는 단어는 holy 혹은 saint입니다. 영어 성경에서 성도는 성인과 같거나 그 이상입니다. 엘스버그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성인들이 결점이 없고, 기적을 행했고, 교회에서 생을 보냈고, 고통을 기꺼이 감수했고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성인들을 머릿속에 그리는 한 그들에게 닿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의 삶은 성인들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일상 속에서 고통을 경험한다. 성인은 고행이나 기적 때문이 아니라 사랑과 선함에서 탁월함을 드러낸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치게 된다. 성인들은 균형과 유머, 연민과 관대함, 장애물과 역경 앞에서 가진 평화와 자유의 정신, 모든 것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능력으로 알려져 있다. 성인들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상기시켜 주는 사람들의 사랑과 용기와 내적인 조화는 사람이 취해야 할 바를 알려주는 기준으로 다가온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더 큰 기쁨을 느끼고, 살아 있음을 감사하며, 그들의 내적인 빛남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할 것이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했다. ‘행복이란 정확하게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에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것을 찾아내면 나머지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할 것이다. 그때에는 거룩한 역설에 따라 한 가지 필요한 것과 함께 다른 모든 것이 주어질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지복을 누린 성인들이 발견한 그 한 가지는 항상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 자신의 운명을 실현하는 것,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이 글을 통해 우리들 자신이 성인으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이 얼마나 복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정체성에 대해 물으면 '영접과 사후 천국'을 이야기합니다. 가슴 아픈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은 삶과 죽음을 갈라놓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이미 영원한 생명이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되기 위해 매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합니다.

도로시 데이와 가톨릭 일꾼

그런 그리스도인을 생각할 때마다 도로시 데이가 떠오릅니다. 다음 글은 도로시 데이에 대한 글의 일부입니다.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일꾼운동이란 무엇인가라고 자문한 뒤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학교이며 노동 캠프이다. 마음이 넓고 사회의식이 있는 젊은이들이 와서 성소를 찾는다. 수개월 혹은 수년을 지낸 후 자신들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들은 사랑하는 방법을 배울 뿐 아니라, 폭력을 재촉하는 위험한 감정,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도 배운다.'”

“엘스버그는 도로시 데이의 생애 마지막 5년 간 가톨릭일꾼공동체에서 함께 살았는데, 그곳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찾던 것을 모두 찾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도로시 데이에게서 성인들의 삶과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성인들을 기독교의 전설적인 인물이 아니라 친구와 동료,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도로시 데이는 거룩함과 기쁨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기도에 깊이 잠겨도, 옆에 있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현존했다. 다른 이들의 고통에 예민하게 깨어 있으면서, 동시에 아름다움의 징표에 민감하여, '기쁨의 의무'라고 부르던 것에 늘 깨어 있었다.”

이 글을 통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위험한 감정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일차적인 모습입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은사를 가지고 자신이 있는 곳을 성소로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을 거룩함과 기쁨으로 채우는 일, 인생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일이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엘스버그가 성인의 의미를 깨닫고 그리스도인이 된 일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자신의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육화시키는 일이야말로 복음의 삶이자 교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깊이 잠기지만 옆에 있는 사람에게 현존했다는 표현은 영성이 지향해야 할 진정한 목표입니다. 기도 그리고 이웃 되는 삶이 어우러진 모습은 진리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소

그러한 삶은 우리의 삶의 장소를 성소로 만듭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아 지성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 지성소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의 삶이 성소가 되어야 합니다. 성인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성소의 의미 또한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로시 데이에 관한 글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소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도록 그분으로부터 초대받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이 말하듯이 '하느님의 창조적 사랑에 응답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이다. 많은 성인들은 당대에 가능한 선택을 넘어 거룩함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안토니오는 사막에서, 베네딕트는 수도원에서,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철저한 가난에서 길을 찾았다. 그들 모두 다른 사람들이 따르도록 그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들의 길은 기존의 방법들을 거부하는 데서 싹텄다. 성서에서 부르심은 항상 하나님께서 이름을 부르시고, "여기 제가 있습니다."라고 응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는 단순히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이 아주 중대한 순간임을 알아채는 것이다. 그것은 초월적인 도전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부르심에 대하여 전적으로 응답할 의지가 있느냐 하는 문제다.”

우리의 삶을 가장 잘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에 응답하여 진정한 자아를 찾고 우리의 삶 전체를 그분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대해 전적으로 응답할 의지가 있다면 우리는 길을 찾게 될 것이며 그 길은 험난한 모험의 길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걷기 시작할 때 그 길은 성소가 되고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는 고귀한 사역, 가장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잿빛 가슴에, 순응해도 우리를 절망시키는 현실에 자꾸 하나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 계시는 곳에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을 자신의 삶 속으로 모셔 들인 사람은 축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이 썩었다고, 교회가 변질되었다고, 희망이 사라졌다고 탄식만 해서는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가장 나쁜 태도는 적당히 길들여진 상태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 대한 배신입니다. 새로운 길을 만들 용기를 내야 합니다. 이사야 19:19은 그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사 19:19).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 땅 중앙에 제단이 세워지고 국경지대에 주님께 바치는 돌기둥 하나가 세워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단 하나, 돌기둥 하나는 하찮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징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통해 제단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돌기둥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징표로서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성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부족한 우리가 성인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오직 한 분, 살아계신 하나님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삶을 통해 성인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삶의 자리를 성소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성소를 발견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지속적인 식별이 필요합니다. 혼자서는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함께 고민하고 기도할 공동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불가능을 목표로

도로시 데이는 "가난한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구원 역사와 함께 추락의 역사는 늘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막 14:7 참조)라는 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은 결코 완성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임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핍절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초대교회의 모습은 스스로 성인 되어 자신의 삶의 자리를 성소로 만들었던 믿음의 선배들이 피워낸 꽃이었습니다.

가난은 약함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게 됩니다. 약함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하고 그 안에 머뭅니다. 우리의 삶 안에 그분을 모셔 들이는 것은 철저한 의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화를 통해 약한 인간이 되셨고, 우리는 약함 안에서 그분과 일치합니다. 그분과 일치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분처럼 사랑 때문에 사랑 안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성인이고 그가 머무는 자리가 성소이고, 그것은 세상 한복판에서 제단이 되고, 변두리에서 돌기둥이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하여 성인이 됨으로써 일상과 교회와 사회와 온 우주에 주님의 주권을 드러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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