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요 6:10-13).

 

이기적인 그리스도인

 

세상의 지탄을 받는 목사나 교회도 문제이지만, 더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는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오해입니다. 영접하면 무조건 구원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입술로만 하는 고백은 영접이라 할 수 없습니다.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아멘!“이라 대답하면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복음이 말하는 구원을 잘못 아는 것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구원은 전인적이며 동시에 통전적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의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구원은 의심해 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음은 얼마 전에 읽은 법륜 스님에 대한 기사의 일부입니다.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은 채 봉사에 나선 법륜 스님의 삶은 늘 상상 이상이다. 세상 사람들은 천당이나 극락행을 원하지만, 그는 지옥행을 자처한다. 그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란 구호를 외친 분들에게 반발하지 말고 “‘지옥 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 받는 이들이 많아서 도움이 필요해 보람 있는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지옥에 안 가고 어디를 가겠느냐는 것이다. 지옥 중생이 한 명도 남지 않는 마지막까지 지옥에 있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처럼 우리도 지옥에 가야 지옥을 없앨 수 있다는 그의 논리는 이기적 행복론과는 전혀 다른 ‘법륜식 행복론’이다.

“사람들의 행복론은 90%가 복을 받고, 도움을 받는, 즉 내가 받는 쪽에 치우쳐 있다. 그러면 더 잘 살게 되어도 정신적 빈곤을 벗어날 수 없다. 사람들에게 덕만 보려고 하지 주체적으로 베풀지 못하면 행복해질 수 없다. 내가 좋은 집, 좋은 직장, 좋은 나라,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나서지 않고 덕을 보려고만 해서는 운 좋게 일시적 행복을 누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속가능한 행복을 만들 수 없다. 진정으로 기쁨과 행복을 느끼려면 삶의 보람을 찾아야 한다. 힘들다고 불행한 건 아니다. 보람이 있으면 힘들어도 기쁘다. 행복하게 자식 키우고, 일을 하고, 봉사하는 것이다. 남에게 도움이 될 때 자기 존재에 대한 자긍심과 보람이 생겨 행복해진다. 그렇게 중생에서 보살로 삶이 전환되어야 삶과 행복의 주인이 된다.”

그런데 모세와 사도 바울도 같은 말을 성경을 통해 전합니다. 모세가 산 위에 올라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있을 때 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은 금을 모아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 있는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애굽 사람들의 방식을 따라 우상숭배를 한 것입니다. 모세는 화를 내며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던져 깨뜨렸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멸망시키겠다고 하시자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출 32:32). 그들이 지옥을 가게 된다면 자신을 먼저 지옥에 보내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똑같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3). 자신의 형제요 골육인 이스라엘이 구원 받을 수 있다면 자신은 지옥에 가도 좋다는 선언입니다. 지옥에 갈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이 지옥에 가겠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이 참으로 구원받았거나 받을 만한 사람임을 증언합니다. 우리 역시 구원 받았다면 이들처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구원 받았으니 끝났다.'라는 식의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이라는 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모세와 사도 바울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이미 죽은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기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나 자칭 그리스도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입니다. 성경에 메아리치고 있는 이 사실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외면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기적인 그리스도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천국은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나가야 합니다.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며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변화와 성숙의 과정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성찬입니다.

성찬의 표징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는 잔디가 많았습니다. 그곳에 사람들을 앉게 하였는데 그 수효가 오천 명쯤 되었습니다. 여기서 "앉게 하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비스듬히 눕게 하라."입니다. 비스듬히 눕는 자세는 (아니피프토) 풍성한 음식을 앞에 두고 느긋하게 먹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왼쪽 팔을 베고 비스듬히 누운 상태에서 오른 손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와 같은 자세는 유대인들이 유월절 음식과 같은 축제 음식을 먹을 때의 자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은 고증과는 다른 그림입니다.

요한복음 6:10에서 예수님이 군중들을 비스듬히 눕게 한 이유는 이미 4절에서 암시되고 있습니다.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웠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유월절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드시는 가운데 성찬을 제정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유월절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 기적이 성찬에 대한 영적 진리를 드러내는 표징임을 알려 줍니다.

구체적인 가르침은 22절 이하에 나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떡과 물고기가 늘어난 것만이 아닙니다 그 불어난 떡이 바로 생명의 떡이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성찬의 연결은 초대교회에서는 이미 일반화된 일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문헌 가운데 하나인 디다케를 보면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이 떡 조각이 산 위에 흩어졌다가 모여 하나가 된 것처럼 당신 교회도 땅 끝에서부터 당신 나라로 모여들게 하소서”(디다케 9:4). 이 기도문은 성찬 때 쪼개진 성체에 대한 감사기도 후 드리는 기도문입니다. 떡이 산 위에 흩어졌다는 말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초대교회는 성찬을 거행할 때 실제로 보리떡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또한 성찬과 떡의 기적의 연결고리입니다. 성찬식이 제정된 이후 지하무덤의 그림을 보면 각 바구니 속에는 보리떡 조각들이 넘치도록 담겨 있습니다.

감사 기도를 드리고 직접 나누어 주시는 주님

공관복음의 병행기사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요한복음의 차이점 중 하나는 "축사하시고"입니다. 우리말로는 똑같지만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공관복음에서는 '유로게오'를 사용했는데 이는 '찬양을 드리다'의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유카스테리오' 인데 이는 '감사를 드리다'는 뜻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최후의 만찬 본문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으로 유월절 음식을 드시면서 성찬을 제정하실 때 그 단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성찬과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22절 이하의 생명의 떡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성찬과 참된 예배의 의미를 알려주고자 합니다.

공관 복음서에서 무리들에게 떡을 나누어 준 사람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음식을 나누어 준 이는 예수님이셨습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을 나누어 앉게 하는 일을 했고 음식을 직접 나누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혼자 이만 명 정도 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셨다면 엄청난 시간이 걸렸을 텐데, 성경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시고 그분만이 우리에게 생명의 떡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떡의 기적을 통해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행 4: 12)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못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절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말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임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살과 피를 먹은 사람은 그분처럼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자기 몸을 죽일 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이며, 그렇게 살아서 죽어야 다시 산다는 것이며, 그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잘 사는 것이며, 그렇게 살아야 모두가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 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자기 맘대로 살다가 죽은 다음에 천국 간다는 이야기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천국이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알 것입니다.

배불리 먹이시는 주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작은 소년이 기꺼이 내어놓은 그 음식은 이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만큼 늘어났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분명 처음에는 물고기가 두 마리 있었는데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을 때는 보리떡만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이 사건을 성찬과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남은 조각을 거두었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새 이스라엘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먹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림과 동시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특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엡 3:17-21).

그리스도의 사랑은 넘치고, 하나님 나라는 풍성합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이 먹고 남은 것을 거두어들여야 할 만큼 언제나 풍요롭게 공급하십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누리게 될 천국 잔치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남은 조각을 거두시는 주님

주님은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어느 것도 쓸데없이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또 다른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음식이 될 것입니다. 선진국에서는 버려지는 음식들이 많은 반면, 지구의 반대편에는 굶주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굶는 것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불공평한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불평등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평평하게 만듭니다. 나 하나의 사랑이 내 주변을 평평하게 만들면 온 세계가 평평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 말하는 것입니다.

불공평을 깨드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기로 작정하고 성찬을 통해 예수님을 먹고 마시면서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간다면 주님은 우리를 풍요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먹고 남을 만큼 풍성하게 공급해 주시고 그 남은 것을 거두어 주변의 굶주린 사람을 먹인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우리는 바로 그런 삶을 살라고, 그런 사명을 감당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찬 때마다 예수님을 묵상하고, 예수님 닮기를 기도하고, 그분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복음이 함의하고 있는 풍요함을 누리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정의와 그분의 나라를 위한 도구가 되어 우리 자신은 물론 곤경에 처한 이웃들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건설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이고 성령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