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부터 영적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영적 성장의 의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길 원하지만, 영적으로 자라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를 경우가 많습니다. 영적 성장을 다른 말로 하면 “영성이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영성이란 그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단어이지만, 영성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성이란 인식된 궁극적 가치를 목표로 하여 자기 초월을 통한 삶의 통합 프로젝트에 의식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얻는 경험입니다.”(Sandra Schneiders, 이강학  번역) 이 정의에 소개되는 영성(혹은 영적 성숙)의 다섯 가지 요소 가운데 지난 시간에는 첫 번째 주제인 “궁극적 가치”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남은 네 가지의 요소를 묵상하며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자기 초월

영적으로 성숙한다는 것은 자기 초월과 관계가 있습니다. 자기 초월이란 나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의 옛 자아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나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이 변하는 것이고,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여도 사람이 변하지 않고, 삶이 변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성숙하는 것이 아닙니다.

캘리포니아 주의 한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교회에서 새로 피아노를 구입하려고 하는데 피아노를 어디에 놓아야 할지에 대해 의견이 갈렸습니다. 한 장로님은 성가대가 있는 단 위에 올려놓자고 했고, 다른 장로님은 좁은 위쪽에 올리기보다 단 아래에 놓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일로 당회가 둘로 갈라져 싸웠고, 결국 교회가 둘로 갈라졌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피아노를 어디에 놓을지의 문제로 교회가 갈라진 것입니다. 5년쯤 지난 후 그 두 장로님들이 한국식품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어색했지만, 인사를 하고 서로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문득 한 장로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때 왜 그렇게 싸웠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만 있자, 그때 피아노를 올려놓자고 한 게 나였나? 당신이었나?”

웃지 못할 일입니다. 5년 지나 기억도 못할 일을 가지고 교회가 싸우고 갈라진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옛 자아의 모습이지요. 우리의 자존심, 교만함, 인정 받고 싶은 마음이 때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우리의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우리는 주님과 함께 우리의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인데, 아직도 내가 죽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나의 옛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의 통합 프로젝트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또한 삶이 통합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믿음과 삶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에서는 믿음이 좋은데, 삶에서는 믿는 대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분이 장로 혹은 집사로 있는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는 부끄러운 말들을 간혹 듣습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기도한 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삶이 통합된다는 것은 믿음과 삶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와 실천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영성과 삶이 통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믿는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인문학을 하나님께』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빵집을 운영하는 어느 집사님이 동네 사람들에게 비난을 샀습니다. 그 이유인즉 이분 빵집의 빵이 유독 작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그 집사님의 별명은 “대포 집사”였습니다. 기도할 때 대포 소리처럼 큰 소리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 집사님이 어느날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면서 목사님을 찾아와 하소연을 했습니다. “목사님, 왜 사람들이 나를 별로 안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기도도 열심히 하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는데요.” 목사님이 이렇게 권면합니다. “집사님, 이렇게 해보세요. 사람들이 좋아할 겁니다. 앞으로 기도 소리는 줄이고, 빵 크기를 늘려보세요.” 뼈가 있는 농담입니다. 기독교인이 기도는 크게 하지만, 삶에서는 신앙인의 모습대로 살아가지 않음을 꼬집는 농담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대로 살아가고, 믿는 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의식적인 참여

영적 성장의 또 다른 의미에는 의식적인 참여라는 요소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훈련입니다. 신앙이 성장하는 것에는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무언가 하나님을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하거나 특별한 은혜를 받으면 믿음이 한 순간에 성장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우리의 삶을 한 순간에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의 영성이 깊어지는 것은 지속적인 영성 훈련을 통해서입니다. 특별한 은혜의 체험이 우리에게 신앙의 계기가 될 수는 있지만, 한 번의 부흥회나 수련회의 은혜가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 놓지는 못합니다. 만일 그랬다면 우리는 벌써 성인의 반열에 올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았다가 또 넘어지고, 특별한 하나님 체험을 했다가 또 시험에 들기를 반복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훈련입니다. 은혜를 체험한 것이 동기가 되어서 지속적인 신앙훈련을 실천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납니다. 영성 훈련이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평생에 걸쳐서 주님과 함께 걸어가야할 길입니다.

 

경험

마지막으로 영적 성장의 중요한 요소는 경험입니다. 곧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입니다. 내 삶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경험입니다. 성령이 나의 삶에서 강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 가운데 성령을 체험하고, 삶의 자리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친밀하게 경험하는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통해 우리의 영성이 깊어져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경험에서 한 가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경험의 해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 경험의 의미를 모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때로는 너무나 강렬하고, 또 날 것의 경험일 때가 있어서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발견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루돌프 오토라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의 성격을 “신비하고, 두렵지만, 황홀한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은 그 의미를 가늠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경험이고, 광대하신 하나님 앞에 서있는 두렵고 떨리는 경험이고, 하지만 세상에서 느끼지 못하는 황홀한 경험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신비하고 두렵고 황홀한 경험의 의미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해야할 일은 이 하나님 경험의 의미를 묵상하고, 분별하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험의 의미를 말로 표현해보고, 우리의 큐티 노트나 영성일기에 적어보면서 그 의미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영성가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영성가들은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이 하나님의 경험에 담긴 의미를 언어로 포착한 사람들입니다. 마치 시인들이 말로 우리가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포착해내듯이, 영성가는 하나님 경험에 담긴 의미를 말로 표현하고 포착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이 노력을 해야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경험의 의미를 표현하고, 그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가는 해석의 과정이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시킵니다. 이 해석의 과정은 개인적인 묵상이나, 공동체의 나눔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공동체로 함께 나누고 분별해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 경험의 의미를 찾아갑니다.

이 다섯 가지가 바로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말에 담긴 의미입니다. 나의 삶에서 가짜들을 버리고 하나님이라는 궁극적 가치를 붙들고, 나의 옛 자아를 벗어버리는 자기 초월이 이루어지고, 믿음과 삶이 함께 가는 삶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영성훈련으로 영적 성장을 위한 의식적인 노력을 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고 그 경험의 의미를 해석하면서 우리의 영성은 자라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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