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 40:1-8).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을 통해 다시 한 번 메아리칩니다. 마리아의 찬가에서도 이 내용이 반복됩니다.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똑같은 내용이 반복된다는 것은 이 내용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은 성경의 골격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합니다.

김기석 목사님은 이사야서 40:1-8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길고 긴 바벨론 포로 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백성들에게 들려온 소리입니다. 더 이상 희망조차 노래할 수 없는 절망의 심연을 뚫고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마음에 이는 찬바람 때문에 몸을 옹송그리고 있는 이들을 감싸주는 솜이불 같은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 같은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새 힘을 얻게 하고, 꺼져가는 심지처럼 가물거리는 백성들의 마음에 하늘 기름을 부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위로는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을 아는 데서 옵니다. 하나님을 망각하고 살던 삶에서 돌이키는 순간 말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우리 속에 유입됩니다. 세상의 어떤 달콤한 말보다도 더 깊은 위로입니다."

이스라엘이 받았을 위로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위로이면서 동시에 책망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유수를 당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불의와 압제로 비천한 이들을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3장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방백과 장로들은 포도원을 삼켰으며 가난한 자들에게서 물건을 탈취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의 질책을 받았습니다.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뇨?"(15a)

이사야서 40:1-8은 포로가 되어 낙망한 이스라엘을 위로해 주시기 위한 약속이 아니라 모든 압제를 제거해야 독재 정권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는 준엄한 경고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들어야 할 경고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자의 얼굴에서 맷돌이 돌아가지 않는 교회를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저울추는 어제나 오늘이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합니다.

이사야서 40:1-8의 핵심은 4절입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골짜기가 돋우어지는 반면 산과 언덕은 낮아집니다. 여기서 "고지"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는 산당이 있던 곳을 가리키는 단어와 동일합니다. 이스라엘이 거짓 신에게 예배하는 산당이 있던 곳을 의미하는 단어와 같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높은 곳이 낮아진다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꾸짖을 뿐 아니라 우상숭배를 위한 모든 산당을 타파할 때 하나님의 대로가 준비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골짜기가 돋우어지며, 산과 언덕이 낮아진다는 구절을 보면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 1:52-53)라고 노래한 마리아의 찬가가 떠오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정의를 노래합니다. 모든 이가 공평하게 사는 하나님 나라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맘몬 앞에 무릎 꿇고 숭배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오늘날 많은 한국 교회들이 그러고 있습니다. 박득훈 목사님은 자신의 책 『돈에서 해방된 교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모습은 구약의 유다 역사 말기를 떠올리게 한다(대하 36:1-7). 당시 남유다는 백성의 총체적 부패, 즉 우상숭배와 사회적 불의로 말미암아 나라 자체가 내리막길을 치닫고 있었다. 애굽과 바벨론의 왕들이 유다 왕들을 폐위시키고 포로로 잡아가고, 새 왕을 세우는가 하면 자기들 입맛대로 왕의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 바벨론은 여호와의 전을 유린하며 성전 기구들을 자기 나라로 가져가 신전에 두기까지 했다. 이쯤 되면 당연히 회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요지부동이었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여호와 앞에서 여전히 악을 행했다. 하나님은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보내셨지만, 시드기야는 고집을 부리며 조금도 뉘우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성전을 아끼는 마음으로 자기 백성에게 예언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셨다. 경고에 경고를 거듭하셨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끈질기게 하나님의 특사들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예언자들을 비웃었다. 저자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모습을 '치유 불능'이라고 묘사한다(대하 36:10). 그 글을 쓸 때 저자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리스도인에게 분명한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골짜기를 메워야 합니다. 산과 언덕을 깎아 내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지 못한 일입니다. 한 마디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책임이 국가와 정치인들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비극입니다. 세상에 산적한 문제를 풀 힘이 우리에게 없다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외면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복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는 처사입니다. 우리 자신은 문제 해결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문제 해결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앞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움직이지만,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을 변화시키시고 당신의 뜻과 나라를 이 땅에서도 이루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외로운 사람들을 감쌀 만큼 넓은 품은 없지만, 우리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 하나를 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외로운 이들을 감싸 안으십니다.

복음의 자유를 온 세상에 전파할 때, 매일의 일상에서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를 할 때,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할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거나 스스로 높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진정한 평등과 고결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 일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슬픔과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돋우는 실제적인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또 세상이라는 산에 올라 스스로를 높이려는 사람들이나 산당에서 여러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선지자 역할을 감당할 수도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제사장, 꾸짖는 선지자로서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다른 이들의 삶에 더욱 깊숙이 들어오시도록 그분의 대로를 닦는 것입니다.

낙담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높이시겠다는 신실한 약속을 주십니다. 반대로 자만심과 자기만족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낮아지라는 하나님의 책망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사야서 40:1-8을 인용하여 회개를 촉구하면서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 1:8)고 말했습니다. 성령은 역사 안에 새로움을 일으키는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성령으로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삶이 태어났고, 성령으로 새로운 공동체, 곧 교회가 태어났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자비와 사랑의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특정인에게 특혜나 기적의 능력을 주시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로마 2,11)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면, 자비와 사랑으로 실천하는 섬김이 우리의 인간관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성령은 이 자비와 사랑의 섬김이 나타나게 하는 원동력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그가 있는 그 자리에서 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고은 시인, 그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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