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요한복음 6:8-9).

영적 성숙과 자기 비움

바울은 다마섹으로 가던 중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극적인 체험이었고 바울의 회심은 진정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투입되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그는 다메섹 체험 이후 13년 간 아라비아 사막에서 지냈습니다. 바울은 당대의 율법학자였으며 열렬한 활동가였습니다. 그런 그가 회심을 했다면 즉시 하나님 나라 사역에 투입되어도 열두 제자들과 비교해 손색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13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아라비아 사막에 고립되어 지내야 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바울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 성숙이었습니다. 영적 성숙의 과정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길과는 정반대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곳에서의 삶은 고립무원의 처참한 몰락 그 자체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산산이 부서져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가 되었습니다.

무소유 공동체인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에버하르트 장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농업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한 노동운동가로부터 대학에 진학하면 노동자들과 함께 살 수 없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결정은 옳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지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려면, 세상에서의 성공과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산산이 부서진 인간, 내세울 것 없는 사람, 온전히 비워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답을 찾았지만

안드레는 빌립과 달리 예수님의 질문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그는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시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안드레는 가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빌립이 머리를 굴리는 동안 그는 무리들 속으로 들어가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찾아내 주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떡과 물고기를 가져다 드리면서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9b)라고 묻습니다. 확고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도리어 힘이 됩니다. 우리 역시 그럴 때가 얼마나 많은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한 아이

안드레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한 아이를 찾아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아이가 안드레에게 왔을 것입니다. 그 아이는 가져온 음식을 모두 내어 놓았습니다. 성경 원문을 보면 그 아이는 아주 어린 아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이 어린 아이는 이그나티우스였다고 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사도 시대 다음 시기를 속사도 시대라고 하는데, 속사도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 이그나티우스입니다. 그는 서기 100년과 110년 사이에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그나티우스는 오병이어 기적 이전에 예수님의 품에 안긴 적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누가 높으냐 하는 문제로 다투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어린아이 하나를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당신 품에 안아 주신 적이 있었는데(막 9:36-37), 그 아이가 바로 이그나티우스라는 것입니다. 이그나티우스는 자신을 가리킬 때 '테오프로스'란 별명을 사용했는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나님이 데리고 다니는 자' 또는 '하나님에게 안긴 자'입니다.

2% 

2% 부족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안드레가 그랬습니다. 그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온 것은 예수님께서 그 작은 양의 음식으로 무엇인가를 하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끝까지 견지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의심으로 끝나고 만 것입니다.

당시 보리떡은 가난의 상징이었습니다. 물고기 역시 발효시킨 작은 물고기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드레에게서 음식을 받아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예수님은 특히 자기의 음식을 기꺼이 내어놓은 어린 아이의 마음을 흡족하게 여기셨을 것입니다.

작은 것에 대한 오해와 무지

안드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드리면서 그것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안드레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를 만났을 때 느끼는 존재의 한계일지도 모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라는 소명을 받았을 때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 3:11)라며 거절했고,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5)라며 뒤로 물러섰고, 예레미야는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렘 1:6)라면서 거절했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눅 5:8)라고 말했습니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 (눅 1:38)라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부족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쓰실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나아가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인간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도 그분에게는 부족합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자들을 택하시는 이유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7-29).

주님의 그릇

 

프란체스코의 친구이자 제자인 맛세오가 "왜 사람들은 당신을 보고 싶어 하고, 말을 들으려 하고, 당신의 말에 순종하는 걸까요? 당신은 미남도 아니고, 학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귀족도 아닌데, 왜 온 세상이 당신을 따르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물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왜 그런지 정말 알고 싶습니까? 주님께서 나보다 더 천하고, 더 부족하고, 더 큰 죄인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일을 위해서 나보다 더 천한 피조물을 찾지 못하셨기 때문에, 나를 택하시어 이 세상의 존귀한 자, 아름다운 자, 강한 자, 지혜로운 자들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모든 선과 덕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지 피조물에게서 오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도 주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비우기에 주님의 뜻을 자기 안에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도구'라는 말보다는 '주님의 그릇'이라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주님의 그릇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9:15)라고 사도행전은 바울을 소개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그릇이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섬기는 자들이 당신의 뜻을 담은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완전히 비워지지 않으면 그 그릇에 무엇을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담기 위해 우리는 모든 것을 비운 작은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에 당신의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작은 아이처럼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모두 주님께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안드레처럼 작은 것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능력이나 소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그 그릇에 주님의 뜻을 담고, 우리가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드릴 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더해진 기적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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