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성경 그리고 분별 (2)

나는 어떤가? 나는 흔히 “기도하는 중에, 환상 중에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주셨어.”라고 말하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내 분별의 타이밍은 잘 일치하지 않았다. 만약 하나님이 늘 적재적소에 말씀하셨다면, 내 인생이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아니, 말씀하셨다면 더 혼란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속을 너무 잘 알아 쉽게 함부로 말씀해 주시지 않는,‘그 속을 알 수 없는’ 하나님은 나의 인내가 바닥을 칠 때쯤 내적 감동이나 말씀으로 주시곤 했다. 그것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말씀이 아니라, 성경을 묵상하는 도중에 읽혀지는 말씀으로 주신다. 그 말씀이 나의 그때 상황에 어찌 그리 정확히 맞아떨어지는지, 소름이 끼치곤 한다. 내게도 말씀이 실재가 될 때가 있다.

2016년 2월 말, 아내가 수술실에 누워 직장을 다 떼어내고 인공항문을 달기로 한 그때(5시간 이상 걸리는 긴 수술이라 했다), 나는 마가복음 2:1-12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다. 그 중 이 말씀이 마음 한가운데 들어왔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침구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11절, 현대인의 성경).

동시에 핸드폰으로 누가 보낸 것인지 알 수 없는 메시지가 왔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신실한 주의 자녀 박 선생님과 가정 위해 기도 드리겠습니다. 힘내세요.”

이어서 전화벨이 울렸다. 수술의사였다. 간단한 처치만 했으니 환자를 데리고 가라 했다. 암 종양은 방사선에 다 타버렸는지 없어졌다는 것. 그래서 장을 다 잘라내지 않고 암이 있던 자리만 긁어냈다고 했다. 조직검사를 해보고 추후의 방법을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 날 아내는 걸어서 병원을 나왔다. 마가복음의 말씀과 같이 자기 침구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할렐루야!”

하지만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여전히 어두운 터널 속에 갇혀 있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의 효력은 무엇인가?

 

2011년 1월, 중미의 신학을 배우려고 과테말라로 내려갔다. 과테말라의 상황은 끔찍했다. 외양은 21세기인데 실상은 한국의 70년대쯤 되어 보였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버스가 언덕을 내려가며 길가에 선 사람들을 정신 없이 들이받는 듯했다. 고삐가 풀린 시장경제였다. 96년 37년 간의 내전이 종식되고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이후 세상은 더욱 더 폭력적으로 변했다. 전쟁에 사용된 온갖 무기들이 시장에 나왔다. 갱들의 세상이 왔다. 갱들에게 상납을 거부한 시내버스가 불에 탔다. 상점들은 쇠창살을 달아야 했고, 사설 경비를 세워야 했다. 동네마다 알아서 치안을 해야 했다.

병원에는 환자들이 넘쳐났다. 오랜 전쟁으로 홀엄마들이 넘쳐났다. 남편들은 전쟁에서 죽었다.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어떤 여성들은 창녀촌으로 출근했다. 피임도, 피임 교육도 없었다. 학교는 만원이었다. 한 학급이 100명 정도, 밥을 못 먹고 오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신발을 못 신고 오는 아이들도 많았다. 한 조각의 빵을 한 달에 겨우 한 번 먹는 아이들이 있었다. 이후 내가 추진한 교육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여자 아이가 학교에서 실신했다. 원인은 영양실조였다.

그런 상황이 너무 괴로웠다. 나의 무능을 매일 뼈저리게 느꼈다. “이 아이들은 누구입니까?”“왜 저를 이곳으로 부르셨습니까?” 아침마다 성경 말씀을 묵상했다. 마침 숙소 휴게실에서 유진 피터슨의 영어판 『메시지』를 발견했다. 어느 날 아침, 갈라디아서 3:8-17 말씀을 읽는데,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라는 걸 깨달았다. 굳이 번역하자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사는(혹은 그러고 싶은) 사람은 하나님이 그에게 예비해 주신 것을 붙잡는다(embracing).”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그것’을 붙잡아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며칠 간 과테말라의 어린이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평균 학력 4년밖에 되지 않는 아이들. 홀 엄마가 노점상을 해 겨우 먹여 살리는 아이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을 켜놓고 책을 읽는 아이들. 청소년만 되면 거리로 나가 갱이 되고 엄마가 되는 아이들. 내가 이 아이들의 아버지가 될 수 없을까?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이 나에게 예비해 주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마음 속에서 충동과 희열이 솟구쳤다. “이 아이들을 껴안아! 네가 이 아이들의 아버지 역할을 해!”

미국의 신학교로 돌아온 나는 교실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학교는 수도원처럼 조용했다. 그 어떤 잡음도 없었다. 모든 게 정돈되어 있었다. 거리를 떠도는 불쌍한 개도 없었다. 먹을 게 없어 쓰레기를 뒤지는 아이들도 없었다. 나는 마치 얼 빠진 사람 같았다. 과테말라 아이들의 웃음, 허기, 포옹,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눈에 선해, 최고의 신학자들에게서 고상한 신학을 배울 수 없었다. 그들의 명강의가 성에 차지 않았다. 내 마음은 여전히 과테말라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미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 알아버렸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답답한 교실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더 이상 공부를 지속할 이유가 없었다.

그해 여름 신학교 2년만 겨우 채우고 밴쿠버로 돌아와 여기저기 쫓아다녔다. 사람들을 만나 호소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G12 프로젝트이다. 과테말라 어린이들의 학력이 최소 12학년이 될 때까지, 즉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다. 고등학교만 마쳐도 아이들은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2019년 1월 현재, 이 프로젝트는 8년째 계속되고 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를 통해 전달된 갈라디아서 3:8-17 말씀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대단한 일을 찾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이 말씀은 내게 육신이 되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통해 읽혀지는 성경은 이처럼 평범한 신도이건 성인이건 간에 많은 사람들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강도가 변해서 목사가 되고, 재산을 탐하던 거부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거리의 전도사가 되고, 음탕한 자가 정결한 자가 되고, 죽음의 문턱에 있던 사람이 새 생명을 얻는다. 성경은 완전한 인도자이며, 궁극적인 주권이다(시 19:7-11). 성경을 통해 우리는 베드로후서 1:2-4의 말씀과 같이, “주 예수를 알게 되고,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으며,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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