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릭 비크너 지음 / 비아토르(2018) 펴냄

“세상에 주목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영혼들은 길을 잃기도 하고 구원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니 내 목숨이 이 세상에 달린 듯이 이 세상에서 살며,
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 주목하십시오. 살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서로에게 주목하고. 일하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주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멈추고, 바라보고, 귀 기울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 하시는지에 주목하십시오.“

책 표지 뒷면에 쓰여 있는 본문 일부이며 『주목할 만한 일상』의 중심 메시지다.

 

저자 프레드릭 비크너는 독실한 불신자와 충성스러운 신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 일상의 세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아파서 신음하는 세상에 하나님께서 왜 당신의 특별한 능력을 쏟아 붓지 않으시는지 의문을 품는 이들을 위해 글을 쓴다. 하나님의 신비와 권능을 열심히 찾아다닌다. 그리고 평범한 일들과 고통스러운 일에서 그 신비와 권능을 발견한다.

저자는 우리가 잘 아는, 아니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일들에 관해 화가의 붓을 들고 글을 쓴다. 우리가 교회에서 거듭 듣는 이야기, 이제는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고 듣기에도 지친 이야기를 새롭게 들려주고, 그 이야기에서 깊이를 발견할 수 있도록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저자는 은혜와 아름다움, 사랑과 소망, 어둠과 빛, 비극과 복, 절망과 기쁨 등을 주제로 글을 쓴다. 예기치 못한, 매번 창의적인, 시간에 매이지 않는, 때로는 터무니없고, 때로는 창피스러운 방식으로, 그러나 우리가 알기로 언제나 믿을 수 있는 분인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요즘 들어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엄지손가락 지문이 찍혀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우리는 내면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성소가 있으나, 수없이 많은 면에서 어지럽혀져 있습니다. 어쨌든 성소는 거기에 있고, 나도 모르게 내면의 성소를 향하게 되고, 그 앞에서 잠잠해지는 법을 익히려 애쓰게 됩니다.”라고 저자는 서문에서 말한다.

프레드릭 비크너는 미국의 작가이자 목사이다. 1981년 『고드릭』으로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1972년에 『사자 구역』으로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30권이 넘는 그의 책은 전 세계에서 27개 언어로 출판되었다.

24세에 소설 『긴 하루의 죽음』으로 문단에 데뷔했고, 작가로서 이력을 쌓고자 뉴욕에 체류하던 중 회심했다.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하고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았다. 9년 간 사립학교 교목으로 재직한 뒤, 지금껏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으며, 설교 요청을 받으면, 다양한 곳을 찾아가 설교해 왔다. 그의 작품은 소설과 비소설이 반반이다. 그는 진부한 종교 언어, 끼리끼리 교회에서만 알아듣는 말들을 자제하고, 일상 속에서 발견한 신비와 은혜, 신앙을 표현할 새롭고도 적실한 언어를 찾아내고자 노력한다. 비크너는 오 헨리 상, 로젠탈 상, 기독교와 순수문학상, 미국 문학예술아카데미 예술문학상을 받았다.

 

(본문 일부)

 

 

 

“예술과 신앙은 상관관계가 아주 깊습니다. 예술과 신앙은 아주 흡사한 목표를 향해 아주 흡사한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우리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 우리 서로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좀 더 예민해지고, 그 사실을 좀 더 의식하고, 그 사실에 좀 더 민감해지십시오. 렘브란트의 눈으로 보고, 바흐의 귀로 듣고, 외피 아래 무엇이 있든 그것을 꿰뚫어 보는 엑스레이의 눈으로 보십시오.”

 

“동양 종교의 요점은, 세상은 벗어나야 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적 신앙은 천지 만물이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까요.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셨고, 이를 유지하시며, 그 가운데서 말씀하시고, 그 가운데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행하셨습니다. 이 세상 때문에 아프셨고, 이 세상에서 밥을 드셨고, 이 세상에서 일자리를 구하셨고, 이 세상에서 설교하셨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셨고, 이 세상에서 죽으셨습니다. 세상은 엄청나게 중요한 곳입니다. 내가 보기에 성경은 다른 무언가를 말하기에 앞서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 있다는 것, 살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 서로에게 주목하는 것, 일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에게 주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고요. 생명 혹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 하시는지에 주목하십시오.”

 

“내가 보기에 세상은 하나의 구유입니다. 온통 피범벅으로 더러운 구유. 하나님이 다시 또 다시 태어나고 계신 구유. 우리는 다른 수많은 일에 정신이 팔린 상태입니다. 이런저런 일로 너무 분주해서 구유를 보지 못합니다.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을 보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보려면, 진실로 누군가를 보려면, 그 누군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고, 앞으로도 절대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보듯 보십시오.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보기에 교리 용어, 시온의 언어, 경건한 표현, 성경이 범주화한 언어 등은 너무 오래 이 손 저 손으로 옮겨 다니는 바람에 거기 새겨진 상이 다 닳아 없어진 동전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일들을 말할 때 쓸 수 있는 좀 더 새로운 용어들이 있습니다. 예술이 바로 그런 용어입니다. 언어를 수반하는 예술만이 아니라, 음악이나 그림 같은 비언어적 예술까지 포괄합니다. 이야기를 활용해 믿음이 무엇인지를 전달하는 일, 물론 나는 모든 예술 중에서 스토리텔링 예술보다 더 성경적 신앙의 본질에 기본 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야말로 기본적으로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그저 평범한,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들려 주는 방식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차이든 차이가 나는 이야기는 오직 두 가지뿐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이야기와 인간의 이야기지요. 우리는 무수한 형태로 변주된 이 두 이야기의 각기 다른 버전으로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 또는 하나님과 인간의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고 세상을 사랑하셨으며, 세상은 길을 잃었고,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의 나머지 부분을 다 동원해 어떻게든 세상을 되찾으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것이 우리 각 사람이 체험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특히 목회자들이 기도를 못하는 이유는 두루뭉술하게 구하는 것 말고는 사실상 아무것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모임에 복 주시고, 저 모임에 복 주시고, 이러이러한 일에 감사하고 등등. 구한 걸 받지 못할까봐, 그러면 어쩐지 자기 믿음이 흔들리고 교인들의 믿음이 흔들릴까봐 무서워서 이들은 뭘 구하기를 늘 두려워합니다. 뭔가를 구하세요. 치유를 구하시고 병 낫기를 구하세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든가. 하나님이 그런 기도를 듣지 않으실 거라든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바꿔 놓을 생각을 하느냐고 하는 내면의 작은 소리에 신경 쓰지 마세요. 수백 년에 걸친 회의주의, 의심, 그 밖의 모든 것의 산물이니까요. 그냥 기도와 함께 떠내려 보내고 기적을 구하는 기도를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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