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한복음 6:1-15)

"고맙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믿는 신은 없다"라고 신학자 칼 라너는 말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신을 부정했지만, 기독교의 신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믿음을 지적하면서 참된 신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잘못된 믿음을 정확하게 본 사람 중 하나인 간디는 예수님을 영원한 스승으로 마음속에 새겼지만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반면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니체는 기독교의 신을 부정하였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신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신과 동일시하여,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각자 다른 길을 걸었던 세 사람의 공통점은 기독교의 신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아야 할 또 다른 사람들은 바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진지한 성찰 없이 기독교의 신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신을 맹신하는 사람들입니다. 맹신은 비실재를 실재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정된 비극입니다. 요한복음 6:1-15에 등장하는 무리들을 통해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

디베랴라는 명칭이 갈릴리 바다와 함께 등장합니다. 요한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지명입니다. 성경에서 갈릴리 바다는 디베랴 바다로도 불립니다. 이스라엘 언어에는 호수와 바다의 구분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갈릴리는 다른 이름들로도 불리는데, 그 중 하나가 디베랴입니다. 갈릴리 지역에 디베랴라는 큰 도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디베랴)의 이름을 딴 도시를 헤롯 왕 안티파스가 갈릴리 호변에 건설했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또 다른 이름은 게네사렛입니다. 누가는 이 지명을 사용했습니다. 호수 북서쪽에 있는 비옥한 평야의 이름이 게네사렛이었고, 그 평야의 이름을 따서 게네사렛 호수라고 불렀습니다. 구약에서는 갈릴리 호수를 긴네렛이라고 불렀습니다(신 3:17; 수 13:27; 19:35). 호수의 형태가 수금과 같다고, 수금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긴네렛으로 불렀습니다.

큰 무리(잠재적 제자)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건너편에 가셨을 때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여기서 ‘따르다’는 동사는 헬라어로 '아콜루테오'인데, 제자 직분을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큰 무리가 모두 제자라는 뜻은 아닙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는 예수님이 병 고치시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큰 무리가 모두 제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믿음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합니다.

이들은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가 될 수도 있고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릴 수도 있었습니다. 6장 서두에서 큰 무리가 제자들로 언급되었지만, 예수님께서 당신이 생명을 주는 참 떡이라고 말씀하시자, 6장 말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떠나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들을 잠재적인 제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그 선지자'보다 위대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6:3에서 예수님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병자들을 낫게 하는 모습을 보고 몰려든 무리를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5절에서도 예수님은 외딴 곳으로 피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가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산에 오르신 이유도 기적을 목격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기적의 도구로 삼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신 이유는 무리를 피하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약 기자들은 예수님의 모든 행동을 구약과 연결시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출애굽기의 모세와 관련된 사건을 떠올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 광야로 인도하여 만나를 먹게 하고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했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5). 이 질문은 민수기 11장에서 모세가 한 질문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민 11:13)와 유사합니다. 그러자 빌립은 대답합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 이는 모세가 하나님께 한 말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민 11:22)를 상기시켜 줍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은 음식을 모아들이라고 명하시는데, 이 명령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모아들이라고 한 명령을 연상시켜 줍니다.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출 16:16). 또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한 무리들의 반응을 모세와 연결시킵니다. 무리들은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14)라고 말하며 흥분합니다. 그 선지자는 신명기 18장 15절에서 예언한 그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기억하며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온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리가 생각하는 그 선지자가 아닙니다. 당시 무리는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 선지자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분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먹게 해주었지만,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여 주셨을 뿐 아니라 생명의 떡을 주셨습니다. 모세의 사명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라는, 온 인류를 향한 새로운 약속과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기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선지자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삼중 직 중 하나가 선지자입니다. 나머지 둘은 왕과 제사장입니다. 그리스도의 삼중 직은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사명을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임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무리는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을 보지 못하고 이 땅에서의 역할인 삼중 직 중에서 선지자 역할을 그분의 모든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신 34:10-12).

이 기사에서 보듯이 유대인에게 모세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고 귀향 후 다시 몰락의 길을 걸어 애굽의 노예 시대와 비슷한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그들에게 모세와 같은 선지자의 출현에 대한 소망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가 다시 나타나 로마로부터 구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기적을 본 무리는 "그 선지자"라 단정하고 임금으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와 비교할 수 없는, 매우 크신 분입니다. 모세와 같은 그 선지자가 아니라 모세보다 더 큰 존재, 생명의 떡을 주시는 분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 기적(듀나미스)이란 말 대신에 표징(세메이온)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예수님의 기적 사건보다 기적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 메시지는 예수님의 신적 정체와 영적 진리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소개된 오병이어의 기적 기사가 공관복음의 기사와 현저하게 다른 것입니다. 공관복음은 기적을 객관적으로 보도하지만, 요한복음은 기적을 보도하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정체와 영적 가르침을 제공합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이면서, 생명의 떡을 주시는 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깨달음과 실천

무리는 예수님과 그분이 일으키신 기적을 보면서도 예수님의 신적 정체와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신학자 칼 라너의 말처럼, 무리는 자신이 보고 믿게 된 예수님을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여 그 틀 안에 가둠으로써 진정한 예수님의 정체성을 보지 못하고 그분의 기적 속에 담긴 의미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복음을 교리로 알고 있는 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을 깨달아야 하고, 복음을 따르는 실천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이 복음 되고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드러납니다. 인간 존엄이 되살아나고 부활의 생명이 드러납니다.

무리는 예수님이 비범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상황과 지식에 갇혀 예수님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무리는 '잠재적인 제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하지 못했고, 예수님의 행보가 자신들이 믿던 것과 달라지자 그분으로부터 등을 돌렸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교리로부터, 관념적인 신앙으로부터, 익숙한 종교 습관으로부터, 욕망으로부터, 자기 지식으로부터, 무엇보다 자아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교회 건물 밖으로 나가 세상 한복판에서 복음을 실천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여 주고, 예수님을 보여 주고,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면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에게 몰려들었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사람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극소수의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흩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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