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19-30).

처음의 자리로

"현대세계에서 그리스도적 이상과 태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그리스도교적 외양은 거의 속빈 강정과 같은 것이며, 과거에 '그리스도교 사회'라고 불리던 사회조차 오늘날에는 무늬만 그리스도교이고 사실은 완전히 유물론적인 이교도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 비그리스도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까지 비폭력과 사랑에 관한 복음의 윤리를 '감상적'이라고 비하하곤 한다."

토마스 머튼의 말입니다. 오래 전에 한 말이지만 오늘날 교회를 향한 선지자적 안목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믿는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져야 합니다. 세상의 법과 하나님 나라의 법 사이에서 날마다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을 따라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삶인지 체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던 말씀의 의미를 날마다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언제나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 관리를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르셨습니다. 그곳에서 도망치고 부서진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그들을 만난 장소였습니다. 그 첫 번째 장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도 첫 번째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첫 번째 자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요한복음 5:19-47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로 주장했기 때문에 신성모독이라는 유대인들의 고발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변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초기 교회 신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같은 분인가 하는 의문 제기는 초기교회에서 계속 있었습니다. 숱한 이단 논쟁과 신학적 고민을 거듭하면서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451년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 기독교 정통 교리로 자리매김할 때까지 논쟁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논쟁을 마무리지을 수 있게 해준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5:19-30입니다.

아버지와의 특별한 관계

예수님은 심문하는 유대인들에게 당신의 행동과 주장이 모두 하나님 아버지와 일치된 관계에서 나온 것임을 여러 번에 걸쳐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말로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반복하시는 이유는 아버지와 당신과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신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한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19-20).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이 고발한 것처럼 자신을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로 주장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고 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가 아니라 철저히 아버지께 의존하는 존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의 속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간질하여 사람들의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단의 역사는 분열로 나타나고 성령의 역사는 하나 됨으로 나타납니다.

"믿는 무리가 모여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

누가가 묘사한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는 말씀에 놀라 그 앞부분의 믿는 무리가 모여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는 말씀을 지나칩니다. 그러나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는 말씀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위대한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의 영으로 하나가 되면 소유에 대한 변화는 자연히 따라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모습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성령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는 무리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치는 따라서 종속이 아닙니다. 아들로서 아버지와 누리는 사랑의 관계, 곧 깊은 일치와 교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관계가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신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한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고 분명하게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그분의 뜻에 따라 행동하시기에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음에 들어 하신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었고, 당신을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런 관계를 통해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설명하셨습니다.

신적 권한

예수님은 아버지를 따라 안식일에도 일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다른 일들도 그대로 따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따라서 하시는 일들은 곧 신적인 권한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권한, 생명을 주시는 권한, 심판하시는 권한, 생명을 주시는 권한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21-23).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신명기 32:39)에서 보듯이 구약성경은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또한 구약성경은 하나님만이 인간을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선포합니다(삼상 2:10, 대하 20:12, 시 7:7; 9:8; 50:6)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심판하는 권한을 맡기셨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을 믿기에 "저리로서(하늘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신앙 고백을 날마다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만이 인간으로부터 공경을 받으실 분이라고 선포합니다(겔 6:21, 시 50:15, 잠 14:31, 사 43:20, 말 1:6).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처럼 공경을 받아 마땅한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생명을 주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는 권한과 심판하는 권한을 위임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을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24-25).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보내신 이를 믿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부활은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미 이루어졌다고 강조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을 믿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서 부활의 삶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과연 우리는 영생의 삶을 누리고 있을까요? 산상수훈을 비롯한 예수님의 말씀들은 바로 영원한 생명을 받은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먼 미래에 천국에 가서나 이루어질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부어졌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엄청난 주장들을 연달아 하셨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만을 따라서 하고(19), 사람들을 살리시고(5:21, 25), 영생을 주시고(24),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26), 온 인류를 심판하는 최후의 심판자(22, 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당신의 하시는 일들을 통해 드러난 신적 권한을 통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우리는 믿고 있는가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믿는 이들에게는 황당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은 분노하여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믿고 있을까요?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기독교가 계시하는 하나님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상,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의미심장한 발언입니다. 우리는 과연 칼 바르트가 말하는 만물의 척도로서 살고 있을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과 한 뜻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에 이끌려 하나 됨의 역사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가 새겨져 있을까요? 각박해져 가는 이 신자유주의 시대 한복판에서 사랑을 실천하면서 부활의 삶을 살고 있을까요?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입술만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신앙은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기 때문에 진실한 것이며, 쉽지 않기 때문에 주어지는 결과가 값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많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그 삶으로 뛰어들 때 성령의 현존과 함께 주님이 말씀하신 모든 주장들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확고한 기반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칼 바르트가 말하는 만물의 척도로서 온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영광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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