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성경 그리고 분별 (3)

성경의 배타적인 지위나 절대적인 권위를 맹신하거나 남용하면 문제가 터진다. 고래로 기독교 역사가 불의와 폭력으로 점철된 이유는 성경을 ‘잘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잘못 믿어서’라고 말하는 게 맞다. 이전에 어느 분별력 강의장에서 만난 한 교인은 자신의 성경 지식에 대해서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성경만 알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는 성경만 있으면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성경은 세상적인 모든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하는 백과사전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고 모범적이지도 못했다. 그가 알고 있는 성경, 모든 답을 다 제공하는 절대적인 성경은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정답’을 제공했지만, 정작 그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쓸모가 없었다. 그는 성경을 남용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분별에 있어서 성경이 가장 근본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이의를 달 수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들이 성경을 이해하고 믿고 성경대로 행동할 때 분별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문제에 대해 문자로서의 성경만 믿는다면(가장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니), 우리의 분별 스위치는 꺼지고, 문제가 터진다. “성경에 쓰여 있잖아?”라고 소리치면 모든 게 다 조용해지지 않았던가?(사실 이건 복음의 선포라기보다 언어 폭력에 더 가깝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안하무인이 되라고 하셨나?)

성경을 분별의 근간으로 생각한다면, 성경 자체에 대한 높은 시각과 이해와 각성을 필요로 한다. 성경을 얼마나 잘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을 얼마나 잘 해석하느냐에 따라 성경은 사람을 죽이는 무사의 칼도 될 수 있고, 사람을 살리는 의사의 메스도 될 수 있다. 디모데후서 2장 15절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성경의 진리는 말 그대로 진리 그 자체이지만,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것은 우리, 에덴 동산의 아담이나 하와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바로 그 믿지 못할 인간들이지 않은가?

성경의 진리, 그 절대적 분별의 권위를 인간들의 편의와 목적을 위해 악용한 사례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4세기 어느 날 꿈에 본 십자가를 내세워 전쟁에서 이겼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가 이룬 기독교 제국화. 십자가의 이름으로 무고한 자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던가? 그리고 그가 이 세상의 기독교화를 꿈꾸는 자들에게 남겨 놓은 권력형 기독제국화의 환상. 그를 이어 약 4백 년 후 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샤를마뉴 대제는 로마제국의 기독교화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가 이룬 기독교화의 근간에는 ‘무시무시한 폭력’이 있었다. “믿으면 살고 안 믿으면 죽는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방패에 새기고 벌인 십자가 전쟁. 주교들의 전쟁 축복. 이어지는 유럽사에서 교황과 황제의 밀약과 횡포. 교회의 정치화. 근대사의 비극인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과 당시 히틀러를 지지하거나 침묵했던 독일(아니 온 세상)의 교회들. 아메리카 현지의 토착민이나 원주민에 대한 백인들의 인종청소 때 앞장서서 지지했던 교회들. 미국에 여전히 남아 있는 심각한 흑백 인종 문제와 교회의 편승. 남아공의 인종차별을 신학적으로 용인하는 교회. 소위 애국이라는 이름으로(주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행된 한국 기독교의 폭력성.

목회자 중심이 아니라 회중 중심의 교회로 알려진, 내가 속해 있는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 총회에서 2012년 <바른 성경 해석의 문제>라는 주제로 발표된 두 가지 역사적인 사건이 이와 무관하지 않아 소개한다. 성경의 권위가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 잘 보라!

 

첫째, 미국에서 노예 제도를 지지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던 성경 해석들은 다음과 같다.

1. 창세기 9:22-27: 노아가 선언하기를, 그의 벗은 모습을 본 것에 대한 벌로 함의 자손들은 셈과 야벳의 노예가 될 것이다.

2. 창세기 24:35; 12:5; 14:14; 20:14: 부유한 노예 주인으로서 남녀 노예들을 소유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3. 창세기 26:12-14: 노예들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게 유산으로 물려 준 재산의 일부였다.

4. 출애굽기 21; 레위기 25: 모세의 율법에는 노예 매매와 처우에 대한 규정이 있다.

5. 에베소서 6:5-9; 골로새서 3:22-25; 디도서 2:9-10; 베드로전서 2:18-19: 그리스도께 하듯 정성을 다하여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노예들에게 말한다.

6. 빌레몬서 12; 고린도전서 7:20-24: 바울은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며 그의 서신을 읽는 노예들에게 그들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상태를 유지하라고 당부한다.

7. 디모데전서 6:1-6: 바울은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라고 명한다.

 8. 로마서 13:1-7: 모든 것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이 바른 법이고 질서이다.

둘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종차별 정책을 지지하기 위해 자주 사용된 성경 해석들이다.

1. 창세기 1:28: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는 다양한 인종들을 분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2. 신명기 32:8-9: “경계를 정하셨도다”는 하나님의 선택을 말한다.

3. 사도행전 17:26-27:  “나라들의 거주의 경계를 하나님이 한정하셨으니.”

4. 사도행전 2:6-11: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모두가 듣는다는 원칙이 성령강림절에 만들어졌다. 이것은 언어에 따라 나누어진 인종별 교회를 정당화한다. 아프리카인 교회, 영국인 교회, 코사족 교회, 줄루족 교회 등.

5. 스스로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의 선민으로 여기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들은 그들이 남아프리카 땅을 취득한 놀라운 일을 설명하기 위해 출애굽 사건을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6. 갈라디아서 3:28: 종과 자유인의 연합, 남자와 여자의 연합, 유대인과 이방인의 연합은 “영적” 연합이고 이 영적 연합은 육적 분리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계속되었다.

7. 로마서 13:1-7: 바울은 국가를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법과 인간의 법에 순종할 것을 강조했다.

이렇게 지독히 배타적인 성경적 진리로 인간들은 노예제도를 합리화했고, 인종차별 정책을 지지했다. 노예제도 지지자나 인종차별주의자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이고, 일요일 아침에 정장을 하고 교회당에 갈 것이고, 식사할 때 식사 기도를 할 것이며, 길가의 거지를 보면 동전을 던져줄 것이며, 예배 시작 시 사도신경을 외울 것이며, 예배 마지막에는 주기도문을 외울 것이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세례를 받았을 것이며, 때때로 성만찬에 참예할 것이며,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갈구할 것이다. 그리고 죽어서는 천국에 가기를 희망할 것이다. 정말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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