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사스시티에서 찾은 선조들의 발자취를 교민사회에 알리기 위해

3.1절 100주년 기념 세미나

지난 3월 1일 오후 1시, 캔사스 주 오버랜드 팍에 위치한 엠마누엘 침례교회에서 캔사스시티 한인회가 주최한 ‘3.1절 100주년 기념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캔사스시티 한인회의 안경호 회장과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미국의 중심부 캔사스시티에서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를 찾아보자는 취지 아래 지난 1월 3일 한인 역사 모임을 만들었고, 그동안의 연구를 교민사회에 알리기 위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박사무엘 교수(센트럴 신학대)는 ‘비폭력저항의 관점에서 본 삼일운동’, 송세준 교수(UMKC 컴퓨터 공학)는 ‘기독교와 삼일운동; 김마리아 여사의 삶과 독립운동’, 안맹호 목사(미국 원주민 선교사)는 ‘한국독립운동의 요람 캔사스시티와 삼일운동’. 서현진 교수(KU)는 ‘여성 인권/참정권의 관점에서 본 삼일운동; 삼일운동과 독립운동에서 여성 지도자들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다음은 각 강연을 요약한 글이다.

 

‘한국독립운동의 요람 캔사스시티와 삼일운동’ - 안맹호 목사(미국 원주민 선교사)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그 의미를 새롭게 하려는 노력이 한창이다. 최근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 독립운동이 계속되었는데,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은 시기적으로도 빨랐고, 그 열기 또한 대단했다. 특히 캔사스시티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립운동의 세 가지 유형인 ‘무력항쟁, 교육 및 계몽을 통한 자강론, 외교노선’과 두루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1888년 캔사스 지역에서 파크 대학 졸업생 메리 헤이든(Mary Haydn), 수잔 도티(Susan Doty)를 비롯해 다수의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파송되었다. 이들은 서울의 정신여학교, 평양의 숭실학교, 대구의 계성학교를 설립했으며, 현대식 교육을 이끌었다. 여기서 교육받은 젊은이 다수가 캔사스시티의 파크 대학으로 유학을 왔다. 대학에서 진리와 자유에 기초한 교육을 받은 그들은 자연스레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차의석과 그를 파크 대학으로 오게 한 조지 맥큔(윤산온) 선교사는 캔사스시티 지역 한국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삼일운동 후 캔사스시티 지역은 독립운동 후원조직인 The League of Friendship of Korea(한국친우회)에도 적극 참여했다. 미국 내 20개 한국친우회 중에서 캔사스시티 한국친우회와 팍빌한국친우회는 캔사스시티에 있었다. 특히 팍빌친우회는 파크 대학 내에서 조직된 것으로 미국 대학의 유일한 한국친우회이다.

캔사스시티 한인사회의 역사는 짧지 않고, 그 무게 또한 가볍지 않다. 이번 연구를 통해 캔사스시티에서 한국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어 가슴이 뿌듯했다. 우리는 파크 대학의 차의석을 비롯한 학생들이 흘린 피와 땀을 기억해야 한다.캔사스시티 한인독립운동에 대한 연구도 계속되어야 한다."

 

‘여성 인권/참정권의 관점에서 본 삼일운동; 삼일운동과 독립운동에서 여성 지도자들의 역할’ - 서현진 교수(KU)

"일제 치하 한국 독립운동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지대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업적을 인지하고 발굴, 보관하는 노력은 충분하지 않다. 2018년 8월까지 포상 받은 15,052명의 독립운동 유공자 중 여성은 2.1%에 불과하다. 다행히 여권 신장이 새롭게 조명되는 시류에 편승해, 정부 또는 민간 차원에서 이 분야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최근 활발해지고 있다. .

그렇지만 삼일절 100주년을 기념하는 크고 작은 모임에서 여성의 역할과 의미를 조명하는 경우는 드물다. 당시 여성들은 남성들과 함께 물리적으로 적들과 싸웠고, 군자금을 모아 전달했으며, 물심양면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대표적인 분들 중에서 의병장 윤희순 여사는 직업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항거했고, 안경신 의사는 임신 5개월의 몸으로 평양 폭탄 의거에 가담했으며, 독립운동의 어머니로 불리는 정정화 의사는 독립자금을 모아 6번 이상 압록강을 건넜고, 여성 교육에도 힘썼다. 김마리아 독립운동가는 3.1 만세 시위를 주동하고 여성 교육과 계몽에 평생을 헌신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조선에 열 명의 김마리아가 있다면 조선은 독립될 것”이라고 말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마리아와 정정화가 강조한 여성 교육의 중요성과 성 평등 개념은 미국의 1세대 여성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는 점이다. 1920년 8월 18일, 미 헌법 19조가 개정됨으로써, 미국 내 여성이 참정권을 포함한 시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인정받게 된다. 이때 한국에 들어온 미국 여성 선교사들로부터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성 평등 교육을 받았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9년 한국의 삼일절 100주년과 2020년 미국 여성 참정권 100주년 모두 역사적으로 중요한 해이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역할을 고찰하고, 계승 발전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비폭력저항의 관점에서 본 삼일운동’ - 박사무엘 교수(센트럴 신학대)

"삼일운동은 대규모 집회와 행진이라는 비폭력저항으로 시작되었다. 삼일운동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배포하는 데 중점을 둔 이유는 당시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세계사적 흐름에 의해 한국의 식민지배도 종결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인의 순수한 독립의지를 만방에 알리기 위해서는 대중 전체의 일관적인 참여가 필요했으며, 무엇보다 비폭력적인 의지를 표출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는 데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삼일운동의 핵심인 독립선언문에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류애와 정의와 평화의 정신이 담겨 있다.

비폭력 저항의 관점에서 삼일운동은 방법과 방향 설정, 지도력에서 한계를 보여 주었음에도, 세계 비폭력 역사에 큰 시사점을 남기고 있다. 먼저 삼일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식민 지배를 당하던 나라에서 펼쳐진,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국 규모의 비폭력 평화운동이었다. 비록 삼일운동은 4월에 끝나고 말았지만, 이천만 겨레가 한마음이 되어 독립 의지를 만방에 평화적으로 표출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세계대전 후 미래를 예측할 수 없고, 누구도 먼저 나서기 힘든 상황에 조선 민족이 비폭력의 함성과 몸짓으로 전 세계에 평화와 자유의 메시지를 던졌다는 자체만으로도 세계사적인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만세” 운동은 국기를 흔들며, 손을 위로 올리고 큰 소리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적극적인 의사 표시였다. 만세는 독립을 성취할 것이라는 기쁨과 감격, 희망이 담긴 축제적 행위였고, 울분과 서러움을 쏟아내는 카타르시스적 행위였다.

삼일운동은 비폭력 저항 운동의 중요한 연구 사례이다. 이러한 비폭력 저항은 그 목적 자체로 의미 있고 운동성이 있다는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기독교와 삼일운동; 김마리아여사의 삶과 독립운동’ - 송세준 교수(UMKC)

"삼일운동은 어떤 영웅이 주도한 독립운동이라기보다, 한일합방 이후 임계점에 다다른 대중의 정서가 표출된 비폭력 운동이며, 희생은 엄청나고 독립을 성취하지 못한 민중 봉기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어, 한국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백여 년 전 파크 대학을 졸업한 젊은 선교사들이 일제 치하의 한국에서 선교 활동과 교육 사업을 했고, 그 제자들이 파크 대학으로 유학을 왔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중 여성 유학생인 김마리아에 관한 자료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면서 조국에 헌신한 김마리아를 존경하게 되었고, 그녀의 신념이나 사상을 좀 더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

김마리아는 1892년, 황해도 송천리(소래 마을) 에서 부친 김윤방과 모친 김몽은의 3녀로 출생했으며, 부친이 설립한 예배당에서 기독교 신앙을 키우고, 선교사가 설립한 정신여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 뒤 근검 성실하고 존경받는 교사로 후학을 양성했다.

사비를 털어 후원한 루이스 교장의 권고대로 억압받는 한국 여성을 개화하고자 일본 유학길에 오른 김마리아는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모임에 적극 참여했다. 1919년 2월 8일, 조선 청년 독립단 독립선언 이후에 일본에서 체포되었고, 선언문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와 활동하다가 삼일운동 이후 다시 체포돼 극심한 고문을 당하고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치료 받는 중에도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직을 맡아 맹활약을 하던 김마리아는 배신자의 밀고로 다시 구금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았다. 여러 선교사들과 애국지사들의 도움으로 가석방되었으나 고문 후유증이 너무 심해서 세브란스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이후 윤산온 선교사와 독립운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상해로 밀항, 남경대학에 입학했으며, 임시정부 황해도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형부 초청으로 미국에 온 김마리아는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에서 교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대한 독립을 주장하는 강연을 했다. 김마리아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야채가게 점원으로 일하며 학비를 마련, 미조리 주 파크빌에 위치한 파크 대학에 입학해 사회학을 공부했으며, 시카고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았고, 뉴욕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또한 재미 교포들과 함께 재미 대한민국 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해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 지원을 했다.

고국에 대한 향수와 루이스 리(마르타 윌슨 신학교 교장)의 권유로 귀국한 김마리아는 원산 마르타 윌슨 신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병마와 싸우다가 해방을 일 년여 앞둔 1944년 3월에 사망했다.

김마리아는 신사참배 강요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굴복했던 때에도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으며, 1998년에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전체 인구의 1~1.5%밖에 안 되던 기독교인들이 삼일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건, 1910년 당시 207명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301개 학교에서 3만 여명의 학생들에게 근대적 민주주의 사상을 가르쳐 기독교적 민족의식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야만적 통치에 저항하는 독립운동과, 기독교 탄압을 해외에 알린 선교사들의 역할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삼일운동의 결과로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국내외에서 무장 독립투쟁이 일어났으며, 물산 장려운동이 전개되었고, 대외적으로 다른 약소민족의 독립과 해방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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