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베드로후서 1:4).

영적 성숙을 가로막는 교회

전도사 시절에 다녔던 교회의 목사님은 늘 교역자들에게 빠르게 움직일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찬송가를 빠르게 불러야 함은 물론, 걸어 다닐 때에도 종종 걸음으로 다녀야 한다는 점을 늘 강조했습니다. 빠르게 움직여야 교회가 부흥한다는 것이 그분의 지론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바쁜 삶은 영혼과 하나님 사이의 단절을 부추깁니다. 교회를 떠나는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조사 결과, 대다수가 교회 활동으로 바쁘면서도 하나님과 친밀하지 못해 내면이 곤고했습니다.

영국의 작가 겸 시인 에벌린 언더힐은 그 점을 예리하게 지적했습니다. "우리는 인생 대부분을 '원하다', '가지다', '행하다'라는 세 가지 동사를 활용하며 보낸다. 하지만 ‘존재하다’라는 근원적인 동사가 그 셋을 포괄하고 초월하지 않는 한, 그 중 어느 동사에도 궁극적인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기계처럼 돌아가는 끊임없는 활동에 여백을 두고 속도를 줄이는 일이야말로 깊고 풍요로운 삶의 필수 조건이다. 기쁨의 영과 서두름의 영은 한 집에 살 수 없다."

신앙이 어린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알고 나서는 마음이 뜨거웠는데 3년이 지나자 열정이 사라졌어요." "그리스도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지나온 지형은 에베레스트 산 겨울 등정만큼이나 힘들었고, 끝없는 사막만큼이나 방향이 묘연했고, 졸졸 흐르는 냇물만큼이나 즐거웠고, 사해만큼이나 생기가 없습니다." 원하고, 가지고, 행하는 일에 몰두하다보니 존재의 변화라는 근원적인 변화에 접근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의 배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묶어두려는 교회들의 전략이 숨어 있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통제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교회건 모든 공예배에 반드시 참석할 것을 요구합니다. 교회 행사 참여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이라며, 신자들을 교회 안에 묶어두려고 합니다. 교회가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으로 고착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교회 일에 적극적이고 교회에서 하라는 대로 해야 영적 성숙이 이루어진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말씀 잘 듣고, 장로님께 인사 잘하고, 교회 일에 적극적이고 거기에 더해 헌금을 희생적으로 할 수 있으면,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다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과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은 무엇일까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새로운 조명

누구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에 감화되고, 주님의 사랑에 감동한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이어집니다. 그동안 한 줄기 빛이 비칩니다.

"빛이 있으라"(창 1:3) 하신 하나님의 명령으로 광활한 우주가 형성되었습니다. 창조하실 때 어둠에서 빛을 불러내신 하나님은 어둠에 빠진 영혼에게 빛을 비추어 영적 방향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사야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시 18:28)라며 기뻐했습니다. 은혜로 새로운 조명을 받은 성도들에게선 하나님의 임재 의식이 되살아나고, 영적 실체가 더욱 분명히 지각됩니다.

C. S. 루이스는 아내 조이와 사별한 슬픔 때문에 어두운 수렁에 빠져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아침에 깨어 보니 어둠이 걷히고 하나님의 얼굴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오늘 새벽의 일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내 마음이 지난 여러 주보다 가벼웠다. 열흘 동안 하늘이 잔뜩 찌푸린 채로 무덥고 습하게 정지되어 있더니 갑자기 햇빛이 나면서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하나님은 근심에 빠진 변증자를 다시 당신의 임재의 빛 안으로 들여놓으신 것입니다. 루이스는 당시를 "더 이상 문이 굳게 잠겨 있지 않음이 느껴졌다. 내가 성질을 못 이겨 스스로 문을 꽝 닫아버렸던 것일까?"라고 회상했습니다. 위기를 통해 루이스는 겸손해졌고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치유

인간은 영혼과 몸이 연합된 전인적 존재이므로 영적인 문제와 심리적인 문제를 따로 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서적, 관계적 결함들이 영적 성장을 방해합니다. 하지만 방향이 회복되는 은혜를 통해 뿌리 깊은 원한, 열등감이나 우월감, 불신과 괴로운 기억의 영역에 새로운 치유가 임하게 됩니다. 파멸을 부르는 육신의 행위들이 밀려나고 그 자리에 생명을 주는 성령의 열매가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간의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불안을 버리고 평안을, 두려움을 버리고 경외를,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자신이 못났다는 느낌을 버리고 자신이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라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영적, 정서적 결함들이 해결되면서 온전한 존재가 되어 갑니다. 머리로만 사는 게 아니라 풍성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께서 강박적인 행동 습성, 노예처럼 속박하는 중독,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기 쉬운 약점 등에서 해방시켜 주셔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을 더 잘 공경하고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 누구도 다시 여러분에게 종의 멍에를 씌우지 못하게 하십시오"(갈 5:1, 메시지).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심리학에 의존하고 인간의 입을 통해 위로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어려움을 통해,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해 빛이 비치고 주님의 보혈이 흘러들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주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 순간 어렵기만 한 인생의 문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정립되고, 용기 있는 새 사람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유의 삶입니다.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진정한 삶입니다.

샬롬

방향이 회복된 신자들은 하나님의 샬롬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이 줄 수 있는 강력한 축복이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샬롬은 예수님이 당신을 신실하게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신 평안의 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고 당당히 외쳤습니다.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모든 어려움이 사라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상황은 그대로일 수도 있고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자각과 함께 마음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부여해 준다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시몬 베드로를 내면의 치유와 통합으로 이끌어 영적 방향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전에 완고하던 베드로가 내적 자아의 온전함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충동적이던 그가 절제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불안정하던 그가 견고해졌습니다. 방향이 회복된 베드로는 담대하게 주님을 증언했으며, 그분을 믿음의 주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샬롬이 그를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방향이 회복되면 내면이 치유되면서 낡은 습성이 밀려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치유가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신 우리의 참자아가 활짝 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예전의 '나'가 아닙니다. 같으면서도 너무나 달라, 사도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영적, 정서적, 신체적 치유를 통해 우리는 역동적인 제자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고상한 목적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이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도 인정을 받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도 않았는데 교회의 중책을 맡습니다. 기독교에 관한 책을 쓰기도 하고 지도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동안 많은 교회들은 그런 사람들을 환영하고 그들의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치장해 주었습니다. 아직도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부자들의 교회가 되었고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산산이 부서지고 새로운 피조물로 회복된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가 될 수 있다는 진리를 명심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도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가 될 수 있지만; 반드시 내면이 치유되고 방향이 회복되는 은혜의 시간을 거쳐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유영모 선생이 말하는 '몸나'인 '제나'에서 '참나'인 '얼나'로 거듭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바깥으로 향하는 여정

이제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내면의 여정에서 변화를 경험한 제자들을 바깥으로 떠밀어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섬기게 하십니다. 영혼이 소생하는 내면의 여정에 반드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외면의 여정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 73:28b)라고 증언합니다.

신학자 로버트 쉐버는 "하나님의 신비로 들어가는 내면의 여정과 다른 사람들의 신비로 들어가는 외면의 여정"에 대해 썼습니다. 영적으로 방향이 회복된 성도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외면의 여정에 올라 사심 없이 사람들을 섬기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는 기쁜 소식을 알려 주려는 것입니다. 타인중심적인 삶에서 우리의 모본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주님은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실 정도로 섬기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도 당신처럼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기회 있을 때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십니다. 당신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당신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명은 섬김과 희생으로의 부르심이지 그분이 이루어 놓으신 섬김과 희생의 결과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바깥으로 향하는 여정에 올라 다른 이들을 섬기고 마침내 우리의 생명까지 내어줄 수 있는 영적 성숙에 이르러야 합니다.

요나는 불순종의 시절을 거쳐 마침내 하나님께 순종하여 니느웨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다가 회복된 후에는 다시 바깥으로 나와 초대 유대 기독교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회심한 뒤 광야에 칩거하며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깊어지자, 성령께서 그를 이방인의 세계로 떠밀어 선교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 창조의 목적

바깥으로 향하는 여정에 들어선 그리스도인들은 사랑 가운데 살아갑니다. 성령께서 다른 사람 중심의 삶, 사랑하는 삶으로 떠미시기 때문입니다. 신앙 여정 초기에는 자신에게 집중할 때가 많지만, 이제 방향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하나님의 훈련으로 자기중심성이 뿌리 뽑히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이 자란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을 말합니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이기심을 버리는 선택입니다.

조셉 스토웰은 아가페 사랑의 요소를 네 가지 꼽았습니다. "첫째, 아가페는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라 선택, 의지적 결단, 헌신이다. 둘째, 아가페는 분명히 그 초점이 상대방에게 있다. 사랑하는 쪽에서 사랑의 대상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다. 셋째, 아가페는 상대방이 알 수 있도록 "느껴진다.", 즉 아가페에는 분명히 감정과 애정도 개입된다. 끝으로 아가페는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세워 준다." 아가페는 분명 신적 사랑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벧후 1:4)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확인합니다. 인간을 변화시켜 당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당신의 성품을 닮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근원적인 존재의 변화입니다. 인간인 그대로 하나님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늘도 그 목적을 향해 멈추지 않고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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