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한복음 5:16-18).

미친 예수

로빈 마이어스 목사는 그의 책 『언더그라운드 교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따르미들의 또 다른 비밀스런 모임을 표시하기 위해 문기둥에 아무렇게나 그렸던 물고기 상징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기 위한 공동식사도 이제는 사라졌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평화주의자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도 사라졌다. 생활필수품도 없는 세상에서 기독교인은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이제는 사라졌다. 처음 기독교인들을 고약한 냄새가 나며 뒤죽박죽이며 감당할 수 없는 바보들의 집단으로 만들었던 철저한 환대도 이제는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사라진 것은 기쁨이다."

저자의 지적대로 세상과는 다른, 교회의 특징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교회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교회를 바라보며 세상과 다르다고 느끼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세상보다도 더 세상적인 교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런 교회를 보며 아무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로빈 마이어스 목사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신뢰다. 신뢰가 없으면 인간의 모든 일들이 붕괴하고 만다. 신뢰가 없으면 계약이 없고, 계약이 없으면 관계가 없다. 관계가 없으면 행복이 없다."

"오늘날 너무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 것에 대해 누구를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것은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라는 생각이 아니라, 자신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망각한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집단이 되어 버린 교회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미치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미치겠다고 서약했음을 잊어버렸다."

마이어스 목사는 두 가지를 지적합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여야 할 교회가 사라져서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따라 살지 않으며, 그 결과 교회가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이 미쳤던 것처럼"이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예수님이 미쳤다는 말을 들으면, 그리스도인들은 불경하다고 화를 낼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도 예수님이 미쳤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 전혀 모르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모해도 너무 무모했고, 그래서 미쳤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분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준 사실을 알게 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핍박하기 시작하고(16), 예수님께서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예수님에게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는 일이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그래서 아들이신 예수님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응답은 유대인들이 듣기에 미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는커녕 그분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조차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셔서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이름인 "야훼"가 나오면, 소리 없이 하늘을 쳐다보거나 '아도나이'라고 바꾸어 읽었습니다. '아도나이'는 주님을 뜻하는 말입니다. 실수로 하나님의 이름을 읽은 사람은 중한 벌을 받았습니다.

물론 유대인들 역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주는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사 63:16).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자신은 그분의 자녀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심한 거부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는 말에 유대인들은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한 것도 기가 찰 노릇인데, 감히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예수님의 주장은 첫 번째 계명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신성모독이었으며, 하나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라는 유대인들의 고백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기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병자를 고쳐 주기에 합당한 날

예수님은 왜 유대인들과 충돌하면서까지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셨을까요? 공관복음서를 보면,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경우를 제외하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날은 늘 안식일이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일부러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안식일을 골라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신 일은 5장과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5:18에서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에 사용된 동사 '엘뤼엔'의 시제는 미완료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반복적으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셨음을 나타냅니다. 고의로 안식일 규정을 어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안식일에만 병자들을 치료해 주신 것은 안식일이 치유에 합당한 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4:3)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생명을 구하는 날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신 벳세다는 세상에서 가장 고통 받는 이들이 모여 있던 곳입니다. 그곳에는 눈먼 이들, 다리 저는 이들,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이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며 누워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기에 벳세다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습니다.

사랑의 이중 계명

예수님은 왜 안식일을 생명을 돌보는 날로 바꾸시려고 했을까요? 사랑을 강조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마가복음 12:28-34에서 예수님은 '사랑의 이중 계명'을 선포하셨습니다. 율법 전체를 줄이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둘째 계명인 사람 사랑은 똑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가르침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와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의 비유입니다. 종말의 날에 의인과 악인이 나뉩니다. 그들을 나누는 기준은 이렇습니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45).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인식의 결정적 조건이 사랑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결정적인 사건이자 유일무이한 계시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등장은 하나님의 사랑이 결정적으로 증명된 사건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통치 방식을 가늠하는 잣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인간이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랑의 범주를 원수까지 확장하시고,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대할 때 마치 하나님 대하듯 하라시면서, 사람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 제사와 행위를 강조하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친 유대인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미쳤습니다. 미친 사람을 그대로 놔둘 수 없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로마로 압송되기 전, 법정에 선 바울에게 총독 베스도가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행 26:24)라고 말하자, 사도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25)라고 응수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향해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29)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본다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모습은 세상에 순응하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며(롬 12:2)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변화는 하나님 나라에로의 초대입니다. 벳세다와 같이 깨어진 세상으로 나가서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아무도 그리스도인들을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세상 상식과는 정반대인 배려와 환대, 공감과 자기희생의 삶 때문에 미쳤다는 소리를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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