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요한복음 5:14-16).

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38년 된 병이 나은 사람은 자기를 고쳐준 사람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너더러 자리를 들고 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만난 그에게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제야 자기를 고쳐 주신 분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그는 물러가서 자기를 고쳐 주신 분이 예수라고 전했습니다.

참으로 배은망덕합니다. 예수님께 치유 받은 사실을 알게 되었으면, 응당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받은 은혜에 보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성정을 알아보시고 변화된 삶을 살라고 경고하셨지만, 그는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즉시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 병을 고쳐준 이가 예수님이라고 일러 바쳤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를 악의에서 비롯된 밀고 행위로 간주합니다. 헬라어로 '물러가다'라는 동사는 '아페르코마이'인데 11장에도 나옵니다. 11장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로, 죽은 사람을 살리는 엄청난 기적을 목격하고도 믿기는커녕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그 사실을 보고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때 사용된 "가서"라는 단어 역시 물러나다라는 의미의 '아페르코마이'입니다. 5장과 11장에서 '아페르코마이'를 사용한 것은 성경 기자의 의도적인 선택입니다.

여기서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감사하지도 않고 주님의 은혜에 응답하지도 않고 주님을 고발하였습니다. 그에게 더 나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간의 고질병, 책임 전가

책임 전가는 타락한 인간의 가장 큰 특성이며 자연적으로 치유되지 않는 인간의 고질병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처럼 병이 나았다면 우리도 예수님을 밀고하였을까요? 망설임이나 갈등 없이 예수님을 해치려는 사람들에게 가서 곧바로 고발할 수 있을까요? 어쩔 수 없이 고발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많은 고민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러질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만든 것일까요?

성경학자 모리스에 따르면, 그는 안식일 법을 어긴 것 때문에 유대 당국의 협박을 받았고 그래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그의 병을 고쳐 주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힐 수 없다면, 그는 인식일 법을 어긴 중죄인으로 처벌될 것이라는 협박을 받았습니다. 그가 처벌 받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을 고쳐 준 사람을 찾아 고발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고쳐준 이를 찾았습니다. 감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처해 있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분을 찾았고,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당사자임을 드러내시자, 곧바로 예수님을 유대 당국에 고발했던 것입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고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생각은 오직 한 가지, 자신의 안위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8년 만에 치유된 그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자요, 언젠가 죽을 목숨을 위해 영원한 생명을 포기한 어리석은 자입니다. 자기 안위만을 위해 행동함으로써 결국 예수님을 배반하게 된 것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은혜로 새 생명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참으로 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육신이 연약하여"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목사도 인간"이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말을 남발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한 무의식의 작동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한다면, 자신이 38년 된 병을 치유 받았던 그 사람과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것입니다.

그가 한 말을 보면, 남 탓 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병이 고질병임을 아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는 뜬금없이 다른 사람들을 원망했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 자기를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으며,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먼저 연못 속에 들어가서 병을 고칠 수 없다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네, 낫고 싶습니다.” 한 마디면 병이 나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는 남 탓을 합니다. 전형적인 책임 전가입니다.

더 나쁜 일

그는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몸 상태로는 결코 다른 이들보다 먼저 벳세다 못에 들어갈 수 없는데도, 그는 물이 출렁일 때마다 들어가려고 하였습니다. 무모할 만큼 집착이나 집념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집착이나 집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시선을 두지 않는 이기적인 집념은 파멸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결과적으로 38년이나 앓던 병을 치유 받은 사람의 집념은 이기적인 집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신 예수님께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몸만 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과 함께 일그러진 그의 영혼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질병보다 더 심각한 것이 영혼의 질병임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병이 나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에게 더 나쁜 일은 건강한 몸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

요한복음 9장에는 이와는 대조적인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38년 된 병자와 다르게 예수님께 믿음으로 응답합니다.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예수님께 의탁합니다. 그 선택으로 인해 그는 회당으로부터 쫓겨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정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같은 은혜를 받고도 예수님을 고발한 38년 된 병자였던 사람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은혜를 입었지만 그들은 서로 다르게 반응하였습니다. 여기서 은혜에 반응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이 새로운 사실이 아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9-13).

빛이신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당신의 빛을 비춰 주십니다. 38년 앓던 사람처럼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에게도,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처럼 은혜를 알고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빛을 비춰 주십니다. 하지만 어떤 응답을 드릴 것인가는 각 사람에게 달려 있음을 이 두 사람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다 나 잘 살자고 하는 일?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 잘 살자고 믿는 것 아닙니까?" 그 말이 맞는다면 우리는 38년 된 병자를 비난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바른 선택을 한 셈입니다. 병이 나아도 그가 속해 있는 사회로부터 추방을 당한다면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으니 병이 나은들 무슨 대수이며 예수님을 안들 성전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자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면 솔직하게 자신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런 말을 듣고도 사실 할 말이 없습니다. 이 시대에 부자 목사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목사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돈이 신처럼 추앙 받는 이 시대에 복음을 붙들고 사는 일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시대에 오지랖 넓게 다른 이들을 생각하며 사는 일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깨달았다면, 날 때부터 소경이었다가 보게 된 사람처럼 우리에게 어떤 위해가 가해질지라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그분의 제자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처럼 누구에게나 빛을 비추어 주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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