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요한복음 5:9-16).

틀린 걸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자신을 종교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종교적 유산이나 원리에 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여론조사들에 의하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보다 무신론자들이나 불가지론자들이 기독교와 성경에 대해 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평생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 한 번 제대로 읽은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교회 신자들이 믿는 많은 부분들이 틀리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올바른 지식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교리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적으로 여긴 교리가 조금이라도 잘못되었다는 정보를 접하면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게다가 많은 교회들이 신자들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생각 없는 사람들로 만듭니다. 그러면 아무리 목사나 교회가 잘못되어도 거기에 토를 달지 못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사회적 신망을 잃어도 무감각해집니다. 틀린 걸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9-15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인 율법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망각하고 율법 자체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율법 준수에만 몰두하는 유대인

38년 된 병자가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간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이날은 안식일이니" 이 짧은 구절은 앞으로 일어날 충돌을 암시합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유대인들은 그것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곧 병이 나았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일어났을 때 치유 역사가 '곧'(유테오스)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신 날은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율법 중 하나였습니다(렘 17:21-22, 느 13:15). 유대인들은 병이 나은 사람에게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다닌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자기를 고쳐 주신 분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뿐이라고 예수님께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병이 나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율법뿐이었습니다. 율법이 더 중요했기에 병자가 치유된 것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안식일을 어겼다는 사실만을 부각시켰습니다.

마가복음 3장에서도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자, 바리새인들은 그 다음 안식일에 일부러 손 마른 사람 하나를 회당에 데려다 놓습니다. 물론 그 사람을 고쳐 주고자 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한 계략이었습니다(막 3:1-6).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요 '소경된 인도자'라고 하시며,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라고 비난하셨습니다(마 23:24). 아무리 철두철미하게 종교생활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헛되다는 사실(고전 13:1-3)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안식일 법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준수하기 위해 39가지 금지 규정을 정하고 이 규정을 준수하기 위한 울타리 율법까지 만들어놓았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안식일에 가능한 한 침을 뱉지 마라. 뱉은 침이 흘러 부스러기를 동그랗게 만들었다면 안식일에 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틀니 착용은 허용되지 않는다. 만일 틀니가 빠지면 자기도 모르게 떨어진 틀니를 집어 들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정원을 거닐면 안 된다. 정원을 거닐다 벌레 먹은 이파리를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 이파리를 따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여자들은 거울을 보면 안 된다. 거울을 보다가 흰머리가 보이면 자기도 모르게 그 머리카락을 뽑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용변을 보아서는 안 된다. 용변 행위는 냄새나고 더러운 것을 내보내는 것이기에 거룩한 안식일을 더럽힌다.”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이 수많은 규정들을 정해 놓고 사람들이 그것을 제대로 지키는지 살펴보았고 지키지 않으면 단죄했습니다. 결국 안식일은 축복의 날이 아니라 악몽의 날로 바뀌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토록 조잡하고 비인간적인 세칙들을 만들었던 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과 연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안식일을 의도적으로 범하신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의 강퍅한 마음을 돌아보게 하기 위함이었지만 그들은 결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옳은 것을 깨닫는 것보다 틀린 것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안식일 규정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안식일이 시작되면 교통 운행이 정지됩니다. 시내버스는 물론 시외버스, 기차, 심지어 항공기와 선박까지 모든 운행이 중단됩니다. 근본주의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전기 스위치를 만지지 않습니다. 전화를 걸지도 않고 받지도 않습니다.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텔레비전도 보지 않습니다. 회당이 멀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금식하며 식사를 하더라도 설거지를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호텔에서는 안식일에 외국인을 위한 승강기와 내국인을 위한 승강기를 따로 운행합니다. 내국인용 승강기는 안식일 내내 매 층마다 문이 열리고 닫히도록 합니다. 승강기 버튼을 누르지 않기 위함입니다.

어째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지금도 이어지는 것일까요? 그들 역시 틀린 걸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 신앙

그렇다고 유대인들만 율법주의자인 것은 아닙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이 율법주의자라는 증거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계명에 대한 순종, 불순종 여부를 따집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하면 문제 될 게 없는데 다른 사람에게 더 엄격하게 적용해서 문제입니다. 결국 판단과 정죄는 '자기의'로 이어집니다.

또한 율법주의자들은 법과 계명 준수 여부에 따라 축복과 재앙이 결정된다고 주장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축복을 누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재앙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예수 성공, 불신 실패'라는 말 몇 마디로 환원되어버립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늘 '해야 한다.'와 '하면 안 된다' 사이를 오갑니다. 율법만 따지다가 이성이 마비되어 버립니다. 그들의 신앙은 자유가 아니라 짐이 됩니다. 늘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죄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사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들은 모두 율법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남보다 낫다.' '나는 남보다 옳다.'는 도덕적 우월주의에 젖어 남을 판단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이나 틀림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교만

율법주의자들이 처음부터 냉랭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가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이기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깨어 있지 않으면 우월감에 사로잡혀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율법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것을 안다면 그는 율법주의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에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가짐을 영적 교만으로 규정하셨고, 당신을 거스르는 적대 행위로 여기십니다.

천사들이 타락하여 사탄이 된 것도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영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자신을 경계해야 합니다.

‘한 과학자가 자기 자신을 복제했습니다. 복제 기술이 완벽해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저승사자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과학자는 자기 복제품을 열두 개나 만들었습니다. 저승사자는 열세 명 중에서 누가 진짜인지 가려낼 수 없었습니다. 빈손으로 돌아온 저승사자에게 염라대왕은 진짜를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저승사자는 다시 그들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완벽하게 자신을 복제하는 데 성공했으니 선생은 천재임에 틀림없소. 하지만 나는 선생 작품 중에서 흠을 하나 발견했소, 아주 작은 흠이지만." 그 말을 듣고 과학자가 펄쩍 뛰며 외쳤습니다. "그럴 리 없소. 흠이 어디 있단 말이오?" 저승사자는 빙그레 웃으면서 과학자를 복제품 사이에서 찾아내 저승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자신이 틀렸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은 교만 때문입니다.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그분의 말씀이 새롭게 들리길 바랍니다. 율법주의로부터 벗어나 사랑의 통로, 생명의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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