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멀리서 왔다는 이유로 자주 볼 수 없는 분들을 봐야 했고, 또 많은 분들이 시간을 내주셨습니다. 안부를 묻고 추억을 이야기하고, 살아가는 이야기와 계획들을 나누는 시간은 매번 즐거웠고 따뜻했습니다. 환영받는 느낌은 힐링에 좋은 약 같습니다.

맛있는 것을 꼭 먹이고 싶다는 수원 누이는 오후가 되어서야 찾아간 동생에게 정성 가득한 반찬을 가지가지 내어 놓았습니다. 민망할 정도로 바라보는 통에 얼마나 먹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매형은 그냥 보내기 아쉽다며 바닷바람이나 쐬자고 차를 몰았습니다. 시차도 있고 서울에서의 일정도 있어서 머뭇거렸지만, 호의를 차마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하긴 오랜만의 만남인데 조금 늦게 간다고 대수겠습니까?

한 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한 화성의 궁평이라는 항구. 방파제 끝에는 전망대가 있고 바다 위에서 해안가를 볼 수 있도록 산책다리도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차를 몰아 해안 도로(콘크리트로 만든 간이 도로)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차가 모래와 진흙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 바람이 많이 불던 날, 밀물에 쓸려온 모래와 진흙이 그대로 남아 도로를 덮어버린 것입니다. 조명이 밝지 않은 곳이었고, 어두컴컴한 밤인지라 안내표지판을 볼 수 없었기에 조심해야 했는데 마음이 앞섰던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상식과 운전 기술을 동원해 뻘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엑셀을 밟을수록 바퀴는 모래 깊숙이 빠지고 마침내 차체의 하단 부분까지 땅에 닿았습니다. 역시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나봅니다. 인적 드문 곳에서 깊어가는 밤, 혹시나 밀물이 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조금 전의 행복감과 즐거움은 저 멀리 가버렸고 ‘차라리’, ‘그러길래’, ‘이러다 혹시’ 하는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왔습니다.

결국 근처의 견인차 업체를 수소문해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비용이 문제겠습니까? 빨리 탈출하지 않으면 더 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요. 내게 호의를 베풀다가 일어난 일이니 비용은 내가 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후 견인차 한 대가 왔습니다. 사고 지점이나 주차 위반 장소에서 보았던 견인차가 이렇게 반가울 수 있다니요.

초조한 우리와는 달리 견인차  운전자는 담담하고 능숙하게 이곳 저곳을 살피더니 견인줄을 빼어 승용차의 뒤쪽에 연결했습니다. 차를 갯벌에서 빼내는 데 걸린 시간은 5분 남짓. 장비에 대한 감탄, 안도의 한숨, 그리고 허탈감. 허탈감은 다시 마음 깊숙한 곳에서 다른 생각을 끌어올렸습니다. ‘견인 비용 15만 원! 아! 너무 비싼데, 다 줘야 하나?’ 그때 어떤 지인은 가입보험회사 부르면 긴급출동으로 그냥 해줄거라고 전화해 주었습니다. 으윽! 그 말은 차라리 안 들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갑자기 우리 모두 자신이 바보 같다고 자책했습니다. 구세주 같아 보였던 견인차 업체는 사고 나길 기다렸다가 돈 떼어가는 얌체업주일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마음 한구석에선 급할 때 부르고 지불할 때 깎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주머니 속의 지폐를 만지작거리며 선뜻 꺼내지 못했습니다.

매형은 멀리 떨어진 곳으로 기사를 데리고 갔습니다. 사정하는 듯한 분위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대충 짐작이 갔습니다. 그 모습을 보여 주지 않은 것은 자신뿐 아니라 나를 위한 배려였을 것입니다. 큰 소리도 나지 않았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은 걸 보니 이야기가 잘 된 모양이었습니다. 우리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를 간직하고, 늦은 밤 서울로 향했습니다.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을 이 에피소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의 마음과 의지가 얼마나 연약하고 악한지요. 들어갈 때와 나올 때, 힘들 때와 편안할 때, 문제가 있을 때와 그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마다 달라지는 성향은 십자가의 은혜 앞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구원 전과 후, 부활 전과 후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많이 다르지는 않은지요. 문제보다 은혜를 크게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적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참 기가 막히시겠구나’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