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로 읽는 아가서 강해(5)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아가서 4:7).

주님께 당신은 어여쁘고 흠 없는 사람인가?  아름다움은 하나님께서 창조 과정에서 누리신 심리적 또는 영적 특질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최초로 빚으신 만물을 보시고 “심히 좋았다”고 하신 그 아름다움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아름다움을 믿음으로써 회복된 실존적 존재들이다. 그 아름다움은 “네가 묘성을 내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욥 38:31)라는 질문 속에 담겨 있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창조의 신비한 아름다움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 아름다움을 회복한 사람들이다.

“삼성의 띠”는 겨울에 나타나는 세 개의 별자리들 중 하나이다. 천구의 적도에 걸쳐 있어 눈에 잘 띄는 겨울철의 별자리지만, 봄철에도 해진 후 서쪽 하늘에 나타난다. 보통 일곱 자매라고 불리는 플레이아데스성단과 냄비자리로 알려진 별의 일단인 오리온성좌이다. 육안으로 보면, 황소자리의 성좌에서 수줍게 반짝이는 여섯 혹은 일곱 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망원경으로 보면, 전체 성단은 직경 50광년의 구형 내에 약 500개의 별로 이루어진,  아주 매력적인 별무리다. 플레이아데스성단은 매우 특별한 성단이다. 은하 또는 산개성단이라고 불리지만, 성단 별 사이의 먼지와 가스가 소량이어서 다른 다수의 산개 성단과는 달리 흩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질문 속에서 현대 천문학적 관측을 통해 발견하는 것은 창조 신비의 아름다움의 극치다. 결국 하나님은 창조의 깊은 아름다움을 이해하느냐고 묻고 계신 것이다.

태초의 인간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만물에 새겨 놓으신 아름다움을 함께 잃어버렸다. 그래서 인간은 만물 속에서 항상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 흠이 없는 아름다움의 본질을 알지도, 보지도, 깨닫지도 못한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영혼은 아름다움을 모른다. 아름다움의 극히 제한된 부분, 그것도 변질된 부분만을 볼 뿐이다.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이런 찬사를 보내는 것은, 술람미가 완전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어서가 아니다. 술람미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인식한 찬사이다. 솔로몬은 그녀의 모든 것을 흠이 없는 아름다움으로 인식한다. 사랑의 관점에서 보는 아름다움이다.

솔로몬의 찬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인간 사랑을 본다. 인간은 스스로 거룩해지거나 의로워질 수 없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 속죄할 수 없다. 지식으로도 인간은 거룩해지지 않는다. 육체를 아름답게 가꾼다고 인간은 의로워지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 실존을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셔서 인간을 사랑이게 하셨다. 죄인도 아니면서 우리의 죗값을 치러 우리를 가치 있게 만들어 주셨다.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사랑하여, 인간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셨다(요일 4:7-10).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셨다는 말이다. 살았으나 죽은 자들을(계 3:1, 롬 6장) 자신의 생명으로 살려내신 사랑이다.

이 사랑에 의해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요일 4:19). 그리스도인이 사랑으로 산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계속 머물며, 사랑의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얻어야 사랑할 수 있게 된다(요일 4:13-17). 우리에게는 그런 사랑을 관리하고 가꿀 책임이 있다. 방종이나 방심은 사랑을 가꾸지 않는 무책임한 태도이다.

사랑은 순결한 삶을 사는 힘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주님을 향한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능력이다. 향상시킨다는 것은 가치, 능력, 매력 따위를 높이는 사랑의 행위를 말한다. 아름다움을 가꾸면서 그 질이 향상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기에 그 사랑은 가꾸어져야 한다. 사도 요한은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장래 그가 나타나실 때에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요일 3:2-3).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으며 그 마음을 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내면, 곧 심령 가꾸기에 더욱 힘쓴다. 사랑은 자신을 흠 없는 실존으로 빚어내는 원천이다. 사랑은 가꾸는 만큼 생명력이 더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확증하고 가꾸어야 한다. 삶에서 하나님이 보여지도록, 외모의 원천이 되는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꾸어야 한다. 상대적 인간이 절대적인 하나님에게 가장 빛나는 실존인 것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절대자인 하나님 없이 인간은 인간일 수도 사랑일 수도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듭난 실존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가꾸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삶은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사랑을 빙자해 무절제할 수 있고 자기애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더욱 엄격해야 하고, 다른 사람을 더 배려해야 하며, 세상에 대해 경고가 되어야 한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리스도를 보길 원한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인 빛과 소금의 삶을 명하셨다.

흠 없는 실존이란 완전한 삶을 요구받는 중압감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극복하는 태도를 말한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 스스로 완전한 삶을 살거나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먼저 사랑으로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고 말씀과 성령으로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그것이 주님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다. 사랑을 안에만 머물게 하면 자칫 이기적인 자기애에 빠지기 쉽다. 주님은 그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완전한 인간이 되어야 구원하겠다고 말씀하시진 않았지만,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싸움을 치러야 한다. 하나는 완전한 자로 살겠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완성에 대한 싸움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집요한 도전에 맞서는 싸움이다. 전자는 내적 싸움이고, 후자는 외적 싸움인 셈이다. 결국 이 두 싸움은 하나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흠 없는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 편집자 주 : 이종남 목사의 아가서 강해집『사랑 I, II, III』일부를 발췌, 연재한다.“아가서는 이 시대를 향한  사랑의 메시지다. 현대인들은 이 메시지를 듣고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라고 이 목사는 말한다. 이 목사는 고신대학원,  New Life Bible College, Moorland Bible College에서 공부했고, 경신여고 교목, 기독교전도대학 교수, 금평교회 담임목사로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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