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성경 그리고 분별(5)

분별 과정에서, 성경이 남용되거나 왜곡되지 않고 올바로 해석되고 이해되고 적용되기 위해, 2012년 필자가 속한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단 총회에서 <바른 성경 해석의 문제>라는 주제로 발표된 내용을 간추린다.

이 교파는 지금까지 한국의 복음주의 진영에서 자라온 내가 봐온 가장 모범적인 신앙적 해석 공동체 중의 하나였다. 2004년 이후 2015년 이 교단의 신학을 마칠 때까지, 외부인 혹은 소수자의 입장에서 이 교회를 관찰해왔지만 아직까지 내가 봐온 일방적이고 문자적이고 목사 중심적인 한국교회의 모습을 조금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런 메노나이트 교회이지만 성경을 읽고 바르게 해석하는 것은 쉬운 과정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이들은 성경의 해석 과정이 함께 가는 여정과 같다고 생각하며, ‘위험한 도랑’을 피해 길 위로 다니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해석의 오류나 위험을 믿음의 성장의 방해물로 보는 게 아니라 도리어 꼭 필요한 과정으로 본다.

아래는 메노나이트 교회가 성경 해석의 올바른 길/지침으로 제시하는 것들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교회와 비교해 보길 바란다. 여러분의 교회는 얼마나 ‘진짜’ 성경 중심인가?

 

첫째,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은 우리가 성경의 모든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핵심이며 해석의 시금석이다.” 성경의 모든 중심은 예수님이시고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예수님 중심으로 읽어야 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첫째, 예수님 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구약 역시 예수님의 관점에서 읽는 것이다. 예수님이 구약성경을 어떻게 사용하시고 해석하시는지를 잘 이해함으로써 각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파악하려는 우리의 전반적인 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사야서가 중요하다. 둘째,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모든 말씀을 묵상하고 해석할 때 ‘예수님이시라면?’의 관점을 놓치면 안 된다. 우리는 예수님의 관점으로 성경을 읽고, 예수님의 관점으로 이해하며, 예수님의 관점으로 성경적인 삶을 살아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모든 말씀들이 동일하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말씀들이 상충될 때(만약 한쪽은 죽이라고 하고 다른 한쪽은 살리라고 한다면?) 이에 대한 심판관은 예수님이 되셔야 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의 출애굽기 21:24과 “네 원수를 사랑하라”의 마태복음 5:44 중 권위는 응당히 주님의 말씀에 있다.

이런 예수중심적인 성경 해석처럼 우리들의 판단 역시 ‘예수님에 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관점으로’ 분별해야 한다. 예수님 없는 분별은 없다. 초심자에게 “왜 성경을 읽는가”라고 물으면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성숙한 교인에게 “왜 성경을 읽는가!”라고 물으면 “예수님을 더 잘 알기 위해서!”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왜 분별하는가?”라고 물으면, “예수님을 더더욱 잘 알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상황적 문맥을 고려해야 한다.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21세기의 우리가 모세 시대 혹은 바울 시대로 돌아가게 된다. 즉 새로운 율법주의자들이 생겨날 수 있다. 상황적 문맥이란 대화 전체 그리고 그것이 주는 느낌과 의도까지 포함한다. 혹은 더 폭넓게 그 이야기나 가르침이나 가치에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환경까지 고려하는 것이다.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특정 상황 속에서 나온 성경 말씀을 또 다른 상황(우리가 처한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때는 ‘대단한’ 주의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에게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나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의 자손들에 대한 왕권의 문제가 오늘날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다. 밴쿠버 리젠트 칼리지의 영성신학자 고든 스미스의 경고는 이때 적절하다. “성경이 쓰인 원래의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무비판적으로 우리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오용하는 것이다.”

이제는 제발 그 옛날 여리고성이 우리 눈 앞에서 단박에 무너져 내릴 것이라 굳게 믿으며, 돌아선 안 될 곳까지 찾아가 계속 돌아대는 어리석은 성경 해석자들이 없기를 바란다. 메노나이트 총회 보고서의 입안자 중 한 명인 루디 버겐(Rudy Bergen)의 결론으로 마무리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시간과 문화를 초월한다고 믿는다. 동시에 우리의 과학적 정치적 세계관뿐 아니라 우리의 언어와 개념들도 상황에 따라 바뀐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상황은 우리가 헤엄치고 있는 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적 상황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 속으로 옮겨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셋째, “건강한 성경 해석을 위해 전체 성경을 기초로 해석 활동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씀이 이미 말씀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각 부분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면, 성경 전체를 조명해야 한다. 성경을 부분적, 편의적으로 이해하거나 적용했을 때의 문제점은 역사를 통해 이미 충분히 검증되었고, 오늘도 건전하고 균형 잡힌 신앙을 위협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성경을 읽거나 배울 때 구·신약을 같이 참고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장애신학의 선각자 마르바 던은 ‘신·구약’이라는 표현이 옛것보다 새것이 좋다는 식으로 오해되기 쉽다면서, 제1, 제2 성경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그녀는, “성경을 계속 읽어 나가되 전체를 아우르며 온전히 읽고, 일부 단절된 요점들에만 집중하여 믿음 생활의 더 큰 패턴을 놓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는 말씀을 통한 바람직한 인격이 형성된다”고 말한다. 성경은 신·구약으로 나눠져 있지만 엄연히 한 권이다.

넷째, 성경은 언제 어디서나 성령을 통해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불쌍한 여행객, 강도,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들을 지금도 세상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성경의 말씀들은 공동체와 세상 가운데에서 말씀을 실제화한다.

다섯째,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의 사랑 이야기(“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의 한 부분임을 기억하라고 한다. 가서 세례를 주라는 복음서에 나오는 명령과 주의 만찬을 기념하라는 초대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단적인 실례들이다.

금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로 추앙 받고 있는 프랑스의 피에르 신부가 ‘엠마우스’라는 빈민구호 공동체를 설립하고, 평생을 가난하고 소외된 자로 살아가게 된 동기는, 이런 하나님과의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사랑의 관계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가 말하는 세 가지 확신에 귀 기울이자. “온갖 잔혹한 행위들이 우리 모두에게 상처를 입히지만 그럼에도 내 신앙생활의 핵심은 세 가지 확신에 토대를 두고 있다. 내 신앙의 첫 번째 토대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확신이다. 두 번째 토대는 ‘우리가 사랑 받고 있다’는 확신이다. 세 번째 토대는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도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인간의 자유가 존재하는 이유다’라는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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