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야고보서 4:13-17).

들으라

야고보 사도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장사하는 이들을 향해 들으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먼저 그 시대의 상황을 살펴봅니다. 그 시대의 부자들은 대지주들과 상인들이었습니다. 부유한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상인이었습니다. 대지주들은 전체 인구의 극소수에 해당하며, 거대한 토지를 대대로 지켜왔던 지역의 토박이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야고보서의 수신자들 속에 대지주들이 끼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가뭄이나 가혹한 세금, 혹은 교통의 발전 때문에 소작농 출신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다니며 물건을 사고팔기 시작했고, 나름대로 부를 축적해 상인 계급을 형성했습니다. 그 중 일부 상인들이 믿음의 공동체로 들어오게 되었고, 세상에서의 성공이 주는 달콤함에 취한 채로 교회 안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교회 안에서 세상을 향한 충동과 유혹을 자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문에 가난한 소작농 신자들의 마음이 나뉘어 서로 시기하고 분쟁하고 다투는 일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인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일갈합니다.

진짜 문제

하지만 진짜 문제는 시기와 분쟁에 휩쓸려 마음이 나뉘어 버린 가난한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의미에서 가난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비참하게 생각하고 세상을 향해 군침을 흘리고, 신앙이 있어도 세속적인 부자 성도들을 존대하고, 가난한 성도들을 차별하기에 바빴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런 '두 마음'의 풍조 때문에 참된 신앙생활의 기준이 바뀌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오늘날의 많은 신자들처럼 '예수 믿고 복 받는 것'이 최고의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진짜 신앙생활은 말의 통제, 고아와 과부를 환란 가운데서 돌아보는 긍휼과,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자신을 지키는 정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롭고 힘든,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지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두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따르는 것은 세상의 지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아닙니다. 신자들은 위로부터 오는 지혜로 살아야 합니다. 그 지혜의 핵심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이 지혜를 세상살이에 그대로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13-15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세상 속에서 두 마음으로 장사하고 생활하는 성도들의 특징을 지적합니다.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15절의 '주의 뜻이면'이라는 말이 그래서 결정적입니다. 장사하는 신자의 생각이나 마음속에 '주의 뜻'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뜻에 따라 믿음에 부요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본질에 속한 부요함과 존귀함을 망각하고, 세상에서 조금 이익을 얻는 것(케르데소멘)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휩쓸린 '두 마음'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현세주의적 신앙은 종말의 날을 잊게 하고, 이웃을 잊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허탄한 자랑(알라조네이아)에 빠지기까지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자랑해야 할 것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영적 지위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주님의 긍휼과 우리가 베푸는 긍휼을 자랑해야 합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를 자랑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자랑이 바뀐 사람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자랑하게 마련입니다. 가치관이 잘못되어 있으면 영원히 '두 마음'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시험이 끊이지 아니하고, 시기와 다툼과 분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선을 행치 않으면

두 마음에서 나오는 세속적인 자랑은 악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런 삶의 태도와 열매, 자랑을 모두 '악한(포네라) 것'으로 규정합니다. 그들은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선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그들을 낳으셨습니다.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 있습니다. 그들이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선한 것'(칼론), 곧 아름답고 덕스러우며 온전한 것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일까요?

선한 것은 문맥으로 보아 13-16절에서 말하듯이 장사하는 영역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분변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럴 때 지혜가 나오고, 헛된 자랑이 사라지게 됩니다.

특히 선한 것을 안다는 것은 지금 세상 속에서 하는 일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종말론적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산하는 날이 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하나하나가 완성된 나라에 열매로 맺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완성에 공헌한 그분의 백성임을 그날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속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께 하듯 해야 합니다. 주님이 사장님이시고, 주님이 CEO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대충 살 수 없습니다. 적당히 일할 수 없습니다. 보는 사람이 없어도, 인정을 받지 못할 때에도, 마치 주님께 하듯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일해야 합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교회가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일한 대가로 망한 사람이 있다면 정직하게 일한 대가로 많은 돈을 번 사람이 그 사람과 나누어야 합니다. 또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선한 일에 동참하도록 하신 분의 뜻입니다.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는 것은 주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공동체는 가장 큰 힘이 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긍휼이 늘 권면하고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이 그리 하라고 지시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자아와 탐욕이 그것을 가로막습니다. 악마로부터 온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은 짓이라고 가로막습니다. 개인의 일은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 말은 속임수입니다. 개인으로서는 복음을 살아내기 어렵습니다. 유무상통하는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체가 되어야 온전한 순종을 이룰 수 있고,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우리는 세상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끝없이 복종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의 뜻'을 존중하고 그분의 통치하심에 따라야 합니다.

자끄 엘륄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콘스탄틴과 루이 14세 치하에서 교회는 국가와 타협함으로써 국가에 종속되었고, 19세기 교회는 자본주의와 타협함으로써 그 순수성을 상실했고, 과학과 타협함으로써 계시된 진리를 빼앗겼다.“

교회는 세상의 해결책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기도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세상 그 누구도 가르쳐 줄 수 없는 하나님의 길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기 전에는 찾을 수 없는 길이며, 인간의 힘에만 의지해선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사회적 영역과 개인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선하심을 체험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 세상의 권세들과 담대히 맞설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연약하지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서 있는 곳이 어디이든 주님의 통치하심을 받는 하나님 백성으로서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과 다르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시간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의 주권이 드러나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유별나다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여 마음이 나뉘어 있다는 표시가 될 것입니다. 세상 권세들과 담대히 맞설 뿐만 아니라 서로를 끝까지 책임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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