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생활의 가장 좋은 점을 꼽으라면 공간적인 여유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하철의 빽빽함도 없고 사이드미러를 접어야 할 정도로 주차 공간이 좁지도 않습니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복잡한 서울 거리나 아파트에서 느낄 수 없는 자연친화적인 주거환경과 맑은 공기는 이민생활의 고됨을 한탄하다가도 귀국을 망설이게 만드는 주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잘 관리된 잔디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얼마나 편안해지는지요. 흙과 나무와 강을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것은 육체적, 정신적 건강면에서 보약과도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니면 전원생활에 대한 로망 때문인지, 올해는 큰 맘 먹고 채소 심을 텃밭도 만들고 뒷마당 한귀퉁이에 닭을 키울 수 있는 우리도 만들었습니다. 옆집에서 매일 아침 울어대는 암탉의 계란 소식이 전원 생활의 꿈을 자극했습니다. 생후 1주일된 병아리 네 마리를 집안에서 한 달 동안 애지중지하며 기른 뒤, 2주 전 마당의 우리로 옮겼습니다. 성장 속도가 빨라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고, 매일 먹어대는 식사량도 부쩍 늘었습니다. 5개월 정도 되면 알을 낳을 수 있다 하니 자급자족의 아침 식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릅니다.

4~5월의 대형마트에선 꽃 판매가 한창입니다. 울타리에 해바라기, 코스모스, 백합 등의 씨앗을 뿌렸고 복숭아와 블루베리 유실수도 두어 그루 사다 심었습니다. 먹거리를 위한 채소도 구입했습니다. 시간과 노력을 절감하기로는 묘종을 심는 것이 효과적이지만, 보람과 기쁨은 씨앗을 뿌리는 경우가 훨씬 큰 것 같습니다. 상추, 참외, 오이, 당근 씨앗을 사서 손바닥에 올려보았습니다. 크기는 모래알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조금 더 큰 딱딱한 고체덩어리였습니다. 두세 개의 알갱이를 검은 흙속에 묻고 지긋이 눌러 주었습니다.

씨앗이 흙을 만나면 생명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아침저녁으로 물 을 준 지 일주일에서 이주일이 지났습니다. 엊그제 씨 뿌린 바로 그 자리에서 연하지만 결코 약하지 않은 새순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줄기의 앙증맞음은 갓난아이의 손가락만큼이나 귀엽고, 양갈래로 펼쳐진 잎의 파릇함은 소녀의 미소만큼이나 수줍고 청초합니다.

생명의 힘은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합니다. 어둠도 그를 방해할 수 없고 콘크리트도 그를 막을 수 없습니다. 잎은 태양을 향해 솟아오르고 뿌리는 땅속을 뚫고 뻗어갑니다. 생명력은 잡초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가꾸지 않아도 사방으로 널리 퍼지는데 그 속도를 따라잡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흙은 씨앗을 주면 열매를 내놓습니다. 인간은 먹거리의 95%를 흙에서 제공받는다고 합니다. 각종 열매는 인간들의 입을 즐겁게 하고 건강을 유지시켜 줍니다. 여름에 고추를 따서 썰어넣은 매콤한 된장국에 호박잎 쌈을 먹는 상상하니 입안에 군침이 돕니다.

흙이 식물을 잘 자라게 하는 데에는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 작용합니다. 겉으로 보면 정지된 세계 같지만 흙 속에서 여러 종류의 미생물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유기물질이 미생물에 의해 분해된 것을 부식토 또는 퇴비라고 합니다. 미생물이 유기물을 먹고 배설하는 점액물질은 땅을 부드럽게 하고, 공기를 유통하고, 땅을 중화시킵니다. 이들은 흙으로 하여금 식물에 더 많은 영양분을 제공하도록 합니다. 촉촉하고 부드럽고 적당히 부서지는 흙이 좋은 흙이라고 하더군요. 이런 흙은 대개 미생물에 의해 부식된 유기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달리 말해, 흙에서 난 것이 적당히 썩어 흙으로 돌아간 것이 좋은 흙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흙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본질이 흙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결국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기업으로 약속하셨습니다. 어쩌면 그 땅은 가나안(팔레스타인)이라는 지리적 의미만이 아니라, 생명과 죽음과 썩음과 돌아감의 순환이 잘 이루어진 좋은 땅을 의미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성급한 마음에 이제 막 싹 틔운 오이 옆에 손가락 굵기의 지지대를 서너 개 세웠습니다. 덩쿨 한가운데 팔뚝 만한 오이가 주렁주렁 달린 모습을 그려봅니다. 블루베리 나무 주위에 닭의 배설물과 흙과 지푸라기를 잘 섞어 뿌려 놓았습니다. 일구고 거름을 얹고 물을 뿌리면서, 그곳에 심긴 채소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잘 먹여달라고 흙에게 부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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