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아가서 5:2a).

사랑에는 긴장하는 속성이 있다. 언제 연주해도 적절한 음을 낼 수 있도록 조율된 현악기 같은 것이 사랑이다. 신부에게서 신랑은, 신랑에게서 신부는 항상 사랑이 연주될 수 있길 기대한다. 그래서 사랑은 방심하지 않는다. 사랑은 언제든지 연주할 수 있도록 조율되어 있어야 한다.

사랑은 자신에 대하여 엄격하다. 버릇없는 태도를 사랑이라고 착각하지 않는다. 질서가 곧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은 질서를 지키며, 무책임하고 버릇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방심하지 않는다.

술람미를 통해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실상을 볼 수 있다.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는 술람미가 적나라하게 자증하는 말이다. 사랑을 말하면서도 방심한 모습이다.  밤이슬을 맞으며 찾아온 신랑의 “문 열어 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문을 열어 맞아들이지 않는 나태한 모습이다. “마음은 그것이 아닌데 자고 있다”는 변명이다.

이는 영적으로 나태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들은 “좀 더 자고 좀 더 눕자”고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믿음이라 착각하며, 이 정도면 잘 믿고 있는 것이라고 믿음의 분량까지 결정하며 영적 게으름에 빠진다.

성경은 게으름이 사람을 깊이 잠들게 한다고 말한다(잠 19:15). 게으른 사람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망령된 핍론(乏論)을 일삼고, 마땅히 해야 할 말을 잃어버린다(딤전 5:13). 이들은 사랑을 잃을 뿐 아니라 사랑을 해롭게 한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보이는 사랑의 방심은 영적 결핍이다. 구원 받은 삶에서 당연히 보여야 하는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자만의 노예가 된 자기 자신만 보인다. 잘못된 신앙은 언제나 기복주의로 나타나는데, 이를 세속주의라고도 한다. 자만은 자신을 정직하게 보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삶의 동력이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므로, 영적으로 메말라 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예수님을 볼 수 없다면, 스스로 복음을 파괴하는 것이다. 스스로 복음을 질식시켜 복음의 능력을 죽이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중증의 ‘예수 결핍 장애’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예수가 없다’는 말은 치명적인 영적 죽음이다. 살았으나 죽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그리스도 외적인 것으로 변질되었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복음이 아니라, 경영적이고 기복적인 무엇으로 운영되고 있다. 성경, 예수, 성령에 대한 증거 대신, 리더십 강좌나 전략 프로그램으로 대체된 현실이 현대의 교회가 세속화되었음을 반증한다. 그리하여 교회에 성공을 추구하는 경영적 리더십은 있어도, 영혼 구원과 헌신적 사랑은 형식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사랑을 말하면서 사랑을 잃어버렸다. 교회가 성공을 예배하기 시작하면서, 예수는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기복적 수단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재적인 번영만 추구하고 영혼 구원에는 관심이 없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치명적인 방심에서 깨어나야 한다.  현실에 안주하는 나태에서 깨어나 하나님을 경험하고 생명이 되어야 한다. 영어의 believe에서 ‘e’만 빼면 be+live, 즉 “생명이 되라”는 뜻이 된다. 생명이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생명이 되어야 하고 그 생명에 잠겨야 한다.

교회에 생명이 없다는 것은 교회의 중심이어야 할 예수님이 빠졌거나 차선이 되었다는 말이다. 교회에서 예수가 빠지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만든 예수’가 아니라 ‘자존하신 예수’를 믿는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시도록 믿음으로 예수를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해야 한다. 내 안의 비인간적인 것을 비워내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

비움 없는 채움은 영적인 낭비다. 비본질적이고 불신앙적인 나를 비우고, 예수를 영접하는 고백으로 찾은 본질적인 나를 채워야 한다. 성경에게 묻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비움과 채움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고 사랑이 되는 것이다. 내 안에 사는 그리스도를 구체적인 삶으로 표현하는 것이 믿음의 삶이다.

참혹하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정체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죄인의 용서와 구속이 동시에 공존한다.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전하라 나는 평화의 왕이지만 너희에게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시작이고 끝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은 생명(구원)과 죽음이 공존하는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 사랑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사랑이기 때문이고,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과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이다. 믿음 없이 사랑할 수 없으며, 사랑을 말하면서 믿음이 없을 수 없다. 사랑과 믿음은 분리되지 않는 하나이다.

 

사랑은 그 속성상 항상 준비되어 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준비한 기름은 사랑의 절대 요소이다. 또한 사랑은 ‘신랑이 더디 오심’을 ‘졸며 자는 이유’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더 긴장하여 깨어 있기를 힘쓰고, 더디 오심의 뜻을 알기 위하여 예민하게 반응한다(마 25:5). 신랑이 더디 오시는 때는 사방에서 택하신 자들을 모으는 상황으로 졸며 자도 되는 시간이 아니다(마 24:31, 42-44). 오히려 자다가도 깨어나, 충성된 종으로서 주인으로부터 맡은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 주기 위해 더 밝게 불을 밝힌다.

사랑은 주인의 소유를 맡은 종의 소명을 안다. 주인이 더디 오신다고 술친구와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방종하지 않으며 사랑으로 산다(마 24:45-46). 신랑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기 위하여 어두울수록 더욱 깨어 있다. 사랑을 아는 신부는 사랑하는 신랑에게서 듣기를 즐거워하며 타성에 빠지지 않도록 자기를 가꾼다. 사랑을 아는 신부는 졸거나 잠들지 않으며, 등잔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기름을 채운다.

* 편집자 주 : 이종남 목사의 아가서 강해집『사랑 I, II, III』일부를 발췌, 연재한다.“아가서는 이 시대를 향한  사랑의 메시지다. 현대인들은 이 메시지를 듣고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라고 이 목사는 말한다. 이 목사는 고신대학원,  New Life Bible College, Moorland Bible College에서 공부했고, 경신여고 교목, 기독교전도대학 교수, 금평교회 담임목사로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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