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성경 그리고 분별 (6)

여섯 번째, 성경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분리될 수 없고, 듣는 것과 행하는 것도 분리될 수 없으며, 실천 없는 지식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준다. 예수님 또한 행함과 믿음 사이의 뗄 수 없는 관계에 대해 계속 말씀하신다. 걷는 것이 등산이지 그냥 길에 앉아서 지도만 연구하는 것은 등산이 아닌 것처럼, 성경은 우리가 알아듣고 실천하기를 바란다.

성경적인 근거가 필요한가? 그렇다면 ‘오직 믿음으로’를 부르짖었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가장 회피했던 성경책을 공부하면 된다. 그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이다”라고 가르친 야고보서이다. 주님 말씀의 백미인 산상수훈은 또 어떤가! 이 말씀은 비현실적이거나 영적이거나 다가올 세상에 대한 것이라는 등의 이유를 들어 왜곡하고 피해가려는 시도들이 있으나, 이는 마치 예수님은 믿지만, 예수님도 가려서 믿다가 결국 예수님을 따르지 않겠다고 발뺌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는 결국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일곱 번째, 성경은 묵상하는 가운데 새 힘을 얻게 하고 기쁨을 주며 매일 영감을 선사한다. 시편 1장 2-3절의 말씀과 같이, 주야로 주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이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만사가 형통하다는 것이다. 마르바 던은 묵상의 현실적인 적용으로 성경암송을 권한다. 그녀는 “구약의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전하도록 그 말씀을 먹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겔 1,2장).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능한 한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그 말씀을 되새김질하고 질문을 던지고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을 더욱 본받아 그분의 이름에 합당하게(즉,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살고 말하는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여덟 번째,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눈 앞에 있는 사람들만이 전부가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간, 많은 사람들의 족적들과 표적들 역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당 교회 안에, 공동체 안에 갇혀 더 큰 그림을 못 보는 오류에 빠져선 안 된다는 것이다. 개인마다 집단마다 성경 해석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분별의 중심은 오직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이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을 본받은 성인들의 삶과 족적이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지독한 예수주의자들인 메노나이트의 영성과 전통이 오늘까지 이어진 데에는, 초기 재세례파들의 순교를 다룬 『순교자의 거울(Martyrs Mirror)』이 있었고,  오직 믿음을 위해 온갖 고문과 박해를 기쁨으로 여기며 죽은 수많은 증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개신’ 교라고 과거가 없는 오늘만으로 신앙을 새롭게 하려는 것은 내일이 되면 오늘도 지워버리겠다며 우리의 발등을 우리가 내려찍는 자학적 신앙과 다름없다. 우리에겐 우리들을 둘러싼, 그리고 우리들보다 먼저 죽은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죽어서도 우리를 위해 드려지는 중보와 도움이 필요하다.

아홉 번째, 성경은 우리에게 은혜와 정의의 관점에서 성경을 이해하도록 촉구한다. 예수님은 한결같이 가난한 자, 병든 자, 이방인, 여자, 사회적인 부랑아들과 같은 가장 취약하고 연약한 사람들의 현실과 필요를 언급하고 배려하는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성경 안에 흐르는 하나님의 의도는 피조물의 온전함을 회복하고, 고아와 과부에게 정의를, 병든 자에게 치유를, 죄인에게 화해와 구원을 베푸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 알고 싶으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성모 마리아의 찬가를 보라!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눅 1:46-53).

마지막 열 번째, 성경을 삶의 지표로 이해하며 말씀을 해석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인도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 가운데 성령님이 계속 일하시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열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없다면 성경 구절들은 단지 종이 위에 인쇄된 건조한 활자의 조합에 불과하다. 분별의 가장 근본적인 권위여야 하는 성경이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직접 관여함으로써 우리가 올바른 판단을 하고,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안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가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도록 양육하고, 가르치고, 증거하며, 예배의 모습을 갖추는 교회로 지도한다.

 

위에 언급된 성경 해석의 올바른 길/지침들은 우리가 피해야 할 위험이나 도랑에 대해서도 말해 준다. 예수님 중심의 성경 해석에서 벗어날 때, 상황적 맥락을 무시할 때, 혹은 성경 전체에 대한 조견을 놓칠 때, 우리는 원치 않는 도랑에 빠지게 된다.

성경의 올바른 해석을 통해 인식의 오류나 영적 도랑에 빠지는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번 성경 해석의 과정에서 빠질 수 있는 도랑들을 몇 가지 간추려 강조해 본다.

첫째,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 중심으로 성경 해석을 하다 보면, 가끔씩 그분의 성경적 뿌리가 히브리 성경인 것과 그분이 처한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1세기 팔레스타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예수님을 보는 경우가 있다. 상황적 맥락과 동떨어져서 예수님을 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복잡다단하고 포스트모던한 21세기의 한복판에 서 있다.

둘째, 구약성경을 밀어내고 싶은 유혹을 피해야 한다. 구약성경은 최소한 두 가지 이유만으로도 성경의 일부이다. 첫째, 신약은 구약의 언어, 이미지, 인용, 가정을 바탕으로 하기에, 이 구약과 신약은 분리될 수 없고, 분리되어서도 안 된다. 둘째, 구약은 신약이 말하지 않는 것들을 말하고 있다.

셋째, Proof-texting을 피해야 한다. Proof-texting란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거나 남의 주장을 반대하기 위해 성경의 일부 구절만 가져다 사용하는 것이다. Proof-texting은 역사적, 문화적 맥락 안에서 그 구절이 가지는 의미와 기능을 고려하지 않으며, 관련된 다른 구절들과 연계하여 그 의미를 해석하지 않는 게 문제이다.

넷째, 일반화를 피해야 한다. 이것은 Proof-texting과 상반되는 경우이며, 신학적 분별에는 둘 다 똑같이 해롭다. ‘성경이 말하기를’ 이라든가 ‘사랑만 있으면’ 혹은 ‘정의의 관점에서 보면’ 등이 일반화의 가장 흔한 예이다.

다섯째, 성경을 해석할 때 우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안정된 정상의 상태’로 가정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알지만...”(고전 13:12)이라고 사도 바울은 고백했다. 이는 우리가 변화하는 상황 가운데 있으며,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세상의 기준인 양 착각해서는 안 된다.

아! 성경 그리고 분별의 길은 이처럼 어렵고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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