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로 읽는 아가서 강해(7)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너희가 어찌 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아가서 6:13-14).

아가서 6:13-14는 해석하기 까다로운 부분이다. 이 구절이 솔로몬의 말이라며, 솔로몬이 술람미를 떠나서도 자기 동산을 성심으로 돌보다가 문득 술람미에게 돌아오게 된 것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이 구절이 술람미의 말이라며, 솔로몬을 만났을 때의 강한 회상이거나 잃었던 교제의 회복을 고백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깨어진 관계의 극적인 회복을 감격스럽게 묘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신랑 신부가 연합하는 기쁨이 여인의 춤을 통해 동적인 이미지로 아름답게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의인 아흔아홉보다 더 기뻐한다는 말씀과 의미적으로 연결된다(눅 15:7).

이 구절은 신랑이 신부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노래하는 부분으로, 사람들이 술람미에게 돌아와서 그 모습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자, 솔로몬이 승전 기념으로 두 줄을 이루어 추는 마하나임 같은 전통 춤을 보고자 하느냐고 반문하는 내용이다.

신부 술람미에 비유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신부로 그와 하나 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며, 신적인 아름다움과 귀함을 소유한 존재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신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구속하신 열매이므로 위의 것을 따라 현재를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골 3:1).

사랑은 사랑이기 때문에 더욱더 자기를 관리한다. 방심하지 않고 안주하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자신을 다스리고 가꾼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깨어 있음을 죽어 사는 것에 비유하며, 세속적인 지체를 죽이지 않으면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일 수도 없다는 양극적 절망을 지적했다.

땅에 있는 지체인 음행과 더러운 것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 곧 우상숭배를 죽이지 않으면, 그것들에 의해 그리스도인들이 죽는다(골 3:5).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일상을 구도적인 자기수양처럼 이해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위의 것은 오직 믿음으로 새사람을 옷 입는 것이다.

구원은 수양이나 수련을 통해 이룰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믿음으로 땅의 지체들을 이긴다. 오직 모든 것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만을 믿고 순종함으로써만 가능한 싸움이다.

사랑은 견디고 참으며 절제하고 용납하고 용서한다. 사실 억울함을 참으며, 소유를 절제하여 나누고,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용납하고, 자신에게 잘못한 자나 불의한 자를 용서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람의 성품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오직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가능한 삶이다.

성경은 성령에 충만하라고 가르친다. 충만함이란 성령께서 나를 다스리고 행하시도록 나를 쳐서 그에게 복종하는 행위다. 내 안의 새사람을 따라 되찾은 내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지 못하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이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내적인 싸움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바울은 그리하여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달려갈 그 길이 끝날 때까지 항상 있을 이 싸움에서 결코 질 수 없다. 우리는 이긴다. 그분이 이기셨으므로 우리도 이기고 있고  이길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며,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산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정한 목표는 저 높은 곳에 있다. 주님의 사랑이 머물고 있고, 주님을 필요로 하는 곳이다. 아프고 고통 받는 처소요 가난한 자리, 어둡고 곤한 곳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명품화되어 있다. 그리스도인 자신을 위하여 입고 쓰고 가꾸므로, 기품 있고 고상하다. 그러나 명품화된 품위는 지독한 교만으로 작용하고, 가난한 자를 정죄하거나 무시한다. 자신이 행하는 일은 당연하다 착각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모두 불의라고 정죄하는 청지기가 되어 있다. 외모로 사람을 규정하고 소유로 통치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되어 있다.

그림 출처 -갓피플

아가서 6:13-14에 나오는 신부는 사람들이 즐거우라고 춤추는 광대나 무희는 아니다. 여기서 ‘마하나임’은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지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야곱이 날이 새도록 하나님의 사람과 씨름하여 축복을 받아낸 곳이 마하나임이었다. 마하나임은 문자적으로 “두 병영”을 뜻한다. 신학자 카일과 델리취는 ‘마나하임’을 천사들의 춤, 환희의 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술람미는 신부로서 환희와 감사가 어우러진 춤을 춘 것으로 이해된다. 여호와의 구원의 은총에 감격한 미리암의 춤과 노래,(출 15:20), 법궤의 귀환을 기뻐한 다윗의 춤(대상 15:20)과 같이, 신부 술람미가 환희에 겨워 춘 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구원의 감격을 춤으로 추어도 모자랄 것이다. 그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감격을 삶으로 이뤄드려야 한다. 사랑으로 사는 삶이다. 이것이 저 높은 곳을 향해 주님과 동행하는 사랑의 여정이다. 그리스도인은 말 한 마디, 얼굴 표정 하나에도 사랑이 드러나야 한다.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는 천 마디의 말보다 감격의 춤사위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겉과 속이 하나로 어우러진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삶은 큰 감동과 울림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파고들 것이다.

저 높은 곳에 뜻과 소망을 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의 소망인 사랑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사랑에 의해 사랑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끝까지 사랑이어야 한다.
십자가 위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주님과 동행하는 사랑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우리를 통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 편집자 주 : 이종남 목사의 아가서 강해집『사랑 I, II, III』일부를 발췌, 연재한다.“아가서는 이 시대를 향한  사랑의 메시지다. 현대인들은 이 메시지를 듣고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라고 이 목사는 말한다. 이 목사는 고신대학원,  New Life Bible College, Moorland Bible College에서 공부했고, 경신여고 교목, 기독교전도대학 교수, 금평교회 담임목사로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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